2361 ★ 그리스비극 걸작선 2/2 - 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 (2025)

에우리피데스 - <메데이아>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

전후파였던 에우리피데스(BC.485/480~406)는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아 다면적이고 유연한 사고로 비극의 범위를 넓히고, 새로운 인물과 새로운 기법을 도입했다. 비극 무대에 영웅들 대신 평범하고 미천한 인물을 등장시켜 인간의 감정을 구체적으로 그려 냈다. 특히 여성의 심리묘사에 탁월했다. 간혹 영웅이 등장한다 해도 그의 성격을 자유롭게 변형해 영웅을 인간화시켰다.

조국 아테나이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진지한 것이었지만, 그의 생애가 두 선배들에 비해 덜 알려져 있고, 그들만큼 인기를 얻지 못한 것아테나이의 제국주의 정책과 전통적 가치에 대한 그의 비판적 태도타고난 비사교적이고 무뚝뚝한 성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에우리피데스는 '만물의 척도는 인간이다'라는 선언으로 유명한 소피스트 프로타고라스와 같은 또래. 소포클레스소피스트 철학에 의해 유발된 정신적 혁명에 동요하지 않고 전통적 가치관을 견지할 수 있었지만, 에우리피데스독자적 사고를 견지하며, 소피스트 철학과 부단한 씨름을 했다. 고대의 작가들 가운데 에우리피데스만큼 다층적이고 난해한 경우도 드물다. 분명 고전기에 속하지만 그의 비극에는 어디서나 확실한 답변보다는 문제제기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문학사에 나타난 최초의 위대한 아웃사이더였음이 분명하다.

5. 메데이아 - 에우리피데스.

이 비극의 소재는 이아손메데이아 신화의 후반에서 취재한 것이다. 아르고호 원정대를 이끈 이아손콜키스 왕 아이에테스의 딸 메데이아 공주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흑해 동안에서 황금 양모피를 구해 왔는데도 펠리아스(이울코스의 왕)가 약속을 어기고 왕위를 내주지 않자, 메데이아는 속임수로 펠리아스를 죽인다. 추방당한 그들은 코린토스로 옮겨 와 여러 해 동안 행복하게 산다.

그러나 이민족 출신 메데이아에게 싫증이 난 야심가 이아손은 가족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라며 코린토스 왕 크레온의 딸(글라우케)과 결혼하기로 결심한다. 절망한 메데이아는 공개적으로 복수를 다짐하고, 크레온메데이아가 자기 딸에게 복수할까 봐 메데이아와 그녀의 두 자식에게 즉시 코린토스를 떠나라고 명령한다. 메데이아는 애걸복걸해 하루의 말미를 얻어낸 다음 독이 묻은 드레스와 머리띠를 결혼선물로 보내 이아손의 신부(글라우케)그녀의 아버지(크레온)를 죽게 만든다.

그리고 메데이아는 제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이는데, 이아손을 자식 잃은 아비로 만들고 싶었고, 자식들은 결혼선물을 전달한 이상 어차피 살해당할 것이 확실하므로 그들의 복수욕을 충족시켜 주느니 어미 손에 죽는 편이 차라리 낫다고 여긴 것이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자 메데이아는 절망에 몸부림치는 이아손을 조롱하며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아테나이로 도망치는데, 그곳 아이게우스에게서 망명하면 받아주겠다는 내락을 미리 받아 두었던 것이다.

(장소 : 코린토스에 있는 메데이아의 집 앞)

유모 : 차라리 아르고호(號)가 검푸른 쉼플레가데스 바위들 사이를 지나 콜키스인들의 나라로 달려가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펠리온山의 골짜기에서 전나무가 도끼에 넘어져 펠리아스를 위해 황금양털을 찾으러 간 가장 뛰어난 전사들의 팔을 위해 노(櫓)를 마련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우리 메데이아 마님께서는 이아손 님을 양한 사랑의 눈이 멀어 이올코스 땅의 성채를 찾아가시지도 않았을 테고. 펠리아스의 딸들을 설득해 그들의 아버지(펠리아스)를 죽이게 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며, 지금 이곳 코린토스 땅에서 남편과 자식들과 함께 사시지도 않겠지요. 마님께서는 도망자로서 이 나라를 찾아오셨지만, 이곳 시민들에게 사랑받고 계시고, 매사에 이아손에게 순종하고 계세요. 아내가 남편과 화목하게 지낸다면 그보다 더 큰 복이 어디 있겠어요!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미움으로 변했고, 애정도 식어 버렸어요. 이아손님이 자기 자식들과 우리 마님을 배신하시고는 왕가의 신부와 잠자리를 같이하시고, 이 나라를 통치하시는 크레온님의 따님(글라우케)과 결혼하시니 말이에요... 남편에게 배신당했다는 것을 안 뒤로 마님은 식음을 전폐하시고 누워 고통에 몸을 맡기신 채 온종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며 얼굴도 들지 않고 방바닥만 응시하고 계세요... 그러다가 이따금 눈부시게 흰 목을 돌려 사랑하는 아버지와 고향과 집을 위해 혼자 슬퍼하곤 하시는데, 이것들을 배신하고 한 사내를 따라 이곳에 왔건만, 그런 마님을 지금 그 분께서 버리셨기 때문이죠. 가련하게도 마님께서는 불행을 당하고 나서야 비로소 고향에 머문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셨지요. 마님께서는 자식들마저 미워져서 봐도 즐겁지가 않으신가 봐요. 무슨 끔찍한 일을 궁리하시는 건 아닌지 그게 두려워요. 마님께서는 마음이 모질어 불의를 당하고는 못 참는 성미니까요. 나는 마님을 잘 아는데, 마님께서 침상이 있는 방으로 몰래 들어가 날카로운 비수로 가슴을 찌르시거나, 아니면 국왕과 남편을 죽여 더 큰 불행에 빠져 들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마님은 무서운 분이에요. 마님과 적으로 맞서는 자는 누구든 마님에게서 승리를 거두기가 결코 쉽지 않을 거예요. 저기 아이들이 벌써 경주장에서 돌아오는군요. 아이들은 어머니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어요. 젊은이는 괴로움 따위는 알려 하지 않으니까요.

(가장교사, 메데이아의 두 아들을 데리고 등장)

가정교사 : 집안에서 마님 시중을 드는 할멈, 어인 일로 그대 혼자 문간에 서서 비탄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오?...

유모 : 이아손님의 아들들을 따라다니는 할아범, 충실한 하인에게는 주인의 불행이 곧 자기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신의 불행이지요...

가정교사 : 가련한 마님은 아직도 비탄을 그치지 않으셨소?

유모 : 부럽군요, 그대의 무지가. 이제 시작이고 아직 반도 못했어요.

가정교사 : 마님께서는 새로운 불행은 전혀 모르고 계시니...

유모 : 그게 뭐죠, 할아범? 숨기지 말고 말해보세요...

가정교사 : 이 나라의 국왕 크레온님께서 여기 이 아이들마저 어머니와 함께 코린토스 땅에서 내쫓으실 거라 했소...

유모 : 아이들이 그런 수모를 당하게 이아손님께서 가만히 내버려 두실까요?...

가정교사 : 새 인연 앞에서 묵은 인연은 물러서기 마련이며, 그 분은 이 집에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아요...

유모 : 그 분께서는 분명 가족들에게 잘못하고 계세요.

가정교사 : 누군들 그러지 않겠소? 이제야 알았소, 누구나 이웃보다는 자신을 더 사랑한다는 것을? 더러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서, 더러는 탐욕 때문에. 그래서 이아손님도 한 여인 때문에 자식들을 배신하는 거죠...

유모 : 마님께서는 노여움을 거두지 않을 거예요, 누군가에게 터뜨리기 전에는. 일을 저지르시더라도 친구들이 아니라 적들에게 그러시면 좋으련만! 도련님들은 어머니 눈에 띄는 곳엔 가지 마세요!... 저 사나운 성질과 굽힐 줄 모르는 마음의 무서운 기질을 조심하세요!

메데이아 : (집안에서) 아아, 가련한 내가 당한 형언할 수 없는 이 고통!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소박맞은 어미의 저주받은 자식들이여! 아비와 함께 사라져 버려라! 온 집이 무너져 내려라!

유모 : 아아, 불쌍한 내 신세! 아버지의 잘못에 아이들이 무슨 책임이 있지요? 왜 아이들까지 미워하세요? 도련님들이 무슨 변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에요. 높으신 분들의 노여움은 무서운 법이니까요. 그 분들은 남의 지배를 받는 경우는 드물고 대개 자신들이 남을 지배하는지라 성질을 억제하기가 힘들기 때문이죠... 위대하지는 않아도 탈 없이 늙어 가는 것이 허락되기를! 중용은 그 이름도 월등히 뛰어나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이 인간들에게 최선이지요. 지나친 것은 인간들에게 어떤 이익도 줄 수 없어요...

코로스 : 목소리를 들었어요. 고함 소리를 들었어요. 그것은 불행한 콜키스 여인(메데이아)의 고함 소리였고, 그녀는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어요...

유모 : 주인님께서는 공주와의 결혼에 정신이 팔려 계시고, 마님께서는 안방에서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계세요. 어느 누구의 말도 마님의 마음을 위로하지 못할 거예요.

메데이아 : (집안에서) 아아, 하늘의 벼락이 내 머리를 뚫고 지나갔으면! 산다는 것이 이제 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아, 죽음으로 이 가증스러운 삶을 지워 버리고 떠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위대하신 아르테미스... 감히 그들이 먼저 내게 부당한 짓을 하다니! 그이와 신부가 궁전과 함께 망하는 꼴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아, 아버지! 아아, 고향 도시여! 수치스럽게도 나는 오라비(압시르토스)까지 죽이며 당신들을 배신했나이다. 메데이아는 이아손에게 반해 조국을 배신하고 함께 도망칠 때 추격해오는 오라비 압시르토스를 죽였다.

유모 : 그대들은 들었나요?... 흐지부지 노여움을 거둔다는 것은 마님께는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옛 사람들은 어리석고 지혜롭지 못하다고 말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아요. 그들은 잔치와 주연과 회식을 위해 귀를 즐겁게 해주는 노래를 지어냈지만, 어느 누구도 아직 詩와 음률이 다양한 노래로 무서운 근심을 달래는 법을 찾아내지는 못했으니까요...

메데이아 : 코린토스의 여인들이여... 남의 마음을 속속들이 알기도 전에 당해보지도 않고 겉만 보고 남을 미워하는 자는 보아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없는 법이지요. 이방인은 당연히 나라에 순응해야겠지요. 하지만 무감각하기 때문에 같은 시민들을 제멋대로 못살게 구는 시민도 나는 칭찬할 수 없어요. 나는 불의의 타격을 받아 마음에 치명상을 입었어요. 나는 끝장났고 삶의 의욕을 잃었으며, 죽고 싶은 심정이에요. 친구들이여! 내 모든 인생이 자기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잘 아는 내 남편이 가장 비열한 인간으로 드러났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말하지요. 우리는 집에서 안전하게 살지만 자기들은 창을 들고 싸운다고. 바보 같으니라고! 나는 아이를 한 번 낳느니 차라리 세 번 싸움터로 뛰어들겠어요... 그대에게는 여기 고향 도시와 아버지의 집과 인생의 행복과 많은 친구들이 있어요. 그러나 나는 외톨이로 고향 도시도 없고 이민족의 나라에서 납치되어 와 남편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어요. 이런 폭풍을 피할 수 있는 항구가 되어줄 어머니도 오라비도 피붙이도 없어요... 여자란 다른 일에는 겁이 많고, 싸울 용기가 없고, 칼을 보기를 무서워 하지만, 일단 결혼의 권리를 침해당하게 되면, 그 어떤 마음도 더 탐욕스럽게 피를 갈망하지는 않을 거예요.

코로스장 : 메데이아, 그런 일을 당하고 슬퍼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에요. 그대가 남편에게 복수하는 것은 정당하니까요. 저기, 이 나라의 국왕 크레온님께서 오고 계세요. 아마도 그대에게 새로운 결정을 알려 주시려나 봐요.

(크레온, 시종들을 데리고 등장)

크레온 : 남편에게 원한을 품고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메데이아. 그대에게 이르겠소. 그대는 추방자로서 두 아이를 데리고 이 나라 밖으로 떠나되, 한시도 지체하지 마시오. 나는 또 이 명령의 집행자로서 그대를 국경 밖으로 내쫓기 전에는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오.

메데이아 : 아아, 더없이 불쌍한 나는 이제 끝장이로구나! 내 적들은 돛들을 모두 활짝 펴는데, 내게는 재앙을 피할 항구마저 없으니. 내 비록 심히 핍박받는 신세이지만 한 가지 묻겠어요. 그대는 왜 나를 이 나라에서 추방하는 거죠?

크레온 : 그대가 치유할 수 없는 재앙을 내 딸에게 안겨 줄까 두렵기 때문이오... 그대는 천성이 영리하고 온갖 사악한 일에 능한 데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원한까지 품고 있소. 그대가 장인과 신랑과 신부에게 위해를 가하겠다고 위협하고 있다는 말을 나는 사람들에게서 전해 들었소. 그래서 당하기 전에 조심하려는 것이오. 관용을 베풀다 나중에 후회하느니 그대에게 지금 미움받는 편이 더 나을 테니 말이오, 여인이여!

메데이아 : 아아, 크레온님... 나는 그리 영리한 편이 아니에요... 나를 두려워 마세요... 나는 국왕 되시는 분들께 위해를 가할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대가 내게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그대는 마음이 끌리는 분에게 따님을 주셨어요. 내가 미워하는 건 내 남편이에요... 그대들은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하게 사세요. 다만 내게는 이 나라에서 살도록 허락만 해주세요. 비록 억울한 일을 당했지만, 나는 잠자코 강자에게 복종할래요.

크레온 : 그대는 듣기 부드러운 말을 하는구려. 하지만 마음속으로 흉계를 꾸미는 것은 아닌지 두렵소. 그런 만큼 나는 그대를 전보다 더 신뢰할 수가 없소이다. 여자나 남자나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영리하면서도 말이 없는 사람보다 감시하기가 더 쉬운 법이니까요. 자, 되도록 빨리 떠나도록 하시오!... 그대는 내게 적의를 품은 채 우리 곁에 머물 수는 없을 것이오.

메데이아 : (크레온 앞에 쓰러져 그의 무릎을 잡으며) 그러지 마세요. 그대의 두 무릎을 잡고 새 신부의 이름으로 빌게요.

크레온 : 그래도 소용없소. 그대는 나를 설득하지 못하오...

메데이아 : 오오, 조국이여, 지금 이 순간 네가 사무치도록 그립구나!...

크레온 : 떠나시오, 어리석은 여인이여! 내 걱정을 덜어 주구려!...

메데이아 : 떠날게요... 오늘 하루만 이곳에 머무르며 내가 우리 피난처와 내 자식들의 생계에 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주세요. 자식들을 위해 아버지는 아무 것도 생각해내려고 하지 않으니 말이에요. 그 얘들을 불쌍히 여기세요. 그대도 아버지고, 그대도 자식이 있어요. 그대가 자비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처사예요. 내가 추방되는 건 걱정이 안 되지만, 아이들이 불행을 당하니 눈물을 금할 수가 없어요.

크레온 : 나는 전혀 폭군의 기질을 타고나지 못해 남을 봐주다가 일을 그르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소. 이번에도 잘못되는 줄 알면서 내 그대의 청을 들어주겠소, 여인이여! 하지만 내일 해가 뜬 뒤에도 그대와 그대의 자식들이 이 나라의 경계 안에 있다가 발각되면 그대는 죽게 될 것이오. 이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오... 설마 그 사이 내가 겁내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지는 못하겠지.

(크레온 퇴장하고, 메데이아 일어선다)

코로스 : 아아, 불운한 여인이여... 그대를 재앙에서 구해줄 집이나 나라를 그대가 발견하게 될까요? 메데이아여, 신은 그대를 구원받을 길 없는 고난의 격랑 속에 빠뜨리셨구려!

메데이아 : 사방에서 불상사가 일어나네요... 하지만 이렇게 끝나진 않을 거예요... 어떤 이익을 노리거나 계략을 위해서도 아니면서 내가 저 사람에게 아첨을 떨었을 거라고 그대는 생각하세요?... 그는 나를 추방함으로써 내 계획이 물거품이 되게 할 수도 있었는데, 어리석게도 오늘 하루 동안 나를 이곳에 머물게 했고, 나는 그동안 세 원수를, 아버지와 딸과 내 남편을 시신으로 만들고 말 거예요. 그들을 죽일 방법은 너무나 많아서 먼저 어느 방법을 택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에요... 하지만 그들이 죽고 나면, 어느 도시가 나를 맞아 줄까요? 아무도 없어요... 하지만 음모가 발각되어 궁지에 몰리게 되면, 그때는 결연히 칼을 들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을 죽일 것이며, 가장 대담한 모험도 불사할 거예요... 헤카테 여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내 마음을 아프게 해놓고 희희낙락하지는 못할 거예요... 자, 메데이아여, 네가 알고 있는 것은 조금도 아끼지 말고 계획을 세우고 계략을 짜도록 해! 끔찍한 일이라도 주저하지 마!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용기가 필요해... 너는 시지포스(코린토스 창건자)의 후손들과 이아손의 결혼을 위해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안 돼! 훌륭한 아버지와 헬리오스에게서 태어난 네가 아니던가... 게다가 우리 여자들은 태어날 때부터 선한 일에는 서투르지만 온갖 악한 일에는 가장 영리한 장인들이 아니던가! 헤카테는 마법과 주술의 여신.... 메데이아의 아버지 아이에테스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아들...

크레온 : 신성한 강물들이 거꾸로 흐르고 법도와 모든 것이 전도되는구나!... 그대는 사랑에 미쳐 아버지의 집을 떠나 쌍바위(쉼플레가데스) 사이를 지나 이국 땅에서 살고 있거늘, 이제 결혼침대를 잃고 남편 없는 몸이 되어, 가련한 여인이여, 추방자로 아무 권리도 없이 이 나라에서 쫓겨나는구려! 쉼플레가데스는 충돌하는 두 개의 바위섬...

(이아손 등장)

이아손 : 격렬한 분노가 구제할 길 없는 악이라는 것을 지금 처음 안 것이 아니라 전부터 나는 잘 알고 있었소... 이아손이야말로 천하 악당이라고 당신이 쉬지 않고 밤낮없이 험담을 해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소. 하지만 통치자들에 대한 당신의 험담에 관해 말하자면, 그 벌이 추방으로 그친 것을 다행으로 여기시오... 그럼에도 나는 가족에게 등을 돌리지 않고, 여인이여, 당신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고 이렇게 찾아온 것이오. 당신이 아이들과 함께 아무 재산도 없이 떠나가지 않도록, 그리고 당신이 궁핍하지 않도록... 설사 당신이 나를 미워하더라도 나는 결코 당신에게 악의를 품을 수는 없을 것이오.

메데이아 : 천하에 고약한 악당 같으니라고!... 그러고도 나를 찾아오다니! 가장 악랄한 내 적이면서! 신들과 나와 모든 인간 종족에게 가장 미움받는 주제에! 가족들에게 그토록 몹쓸 짓을 해놓고 그 면전에 나타난다는 것은 용기도 아니고, 대담성도 아니에요. 아니, 그것은 인간의 모든 결함 중에서도 가장 중대한 결함파렴치예요... 아르고號에 그대와 함께 승선한 헬라스인들이 다 알고 있듯이, 당신을 구해준 것은 나였어요. 불을 내뿜는 황소들에게 멍에를 얹어 부리고, 죽음의 밭에 씨를 뿌리도록 당신이 파견되었을 때 말이에요. 그리고 몇 겹이고 똬리를 틀고는 잠도 안 자고 황금양털을 지키던 용을 죽여 당신에게 구원의 빛을 가져다 준 것도 나였어요. 그 뒤 나는 아버지와 내 집(흑해 동안의 콜키스)조차 버리고 지혜보다는 사랑에 이끌려 당신을 따라 펠리온 산기슭에 있는 이올코스로 갔지요. 그리고 나는 또 펠리아스에게 그의 딸들의 손을 빌려 가장 비참한 죽음을 안겨 줌으로써 당신의 모든 근심을 덜어 주었지요. 이 모든 것을 나는 당신을 위해 했어요, 이 악당아! 그런데도 감히 나를 배신하고 새 장가를 들어! 우리 사이에 자식들까지 태어났는데도... 이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내가 당신을 따라 이리로 올 때 고향과 함께 배신했던 아버지의 집으로? 아니면 펠리아스의 가련한 딸들에게로?... 새 신랑에게는 좋은 비난거리가 될 거예요. 당신을 구해준 내가 거지꼴을 하고 떠돌아다닌다면... 오오, 제우스여, 왜 그대는 가짜 황금에 대해서는 인간들에게 확실한 징표를 주셨으면서, 사악한 인간을 가려낼 수 있는 표지는 사람의 몸에 타고나도록 해주시지 않았나이까?

코로스장 : 친구끼리 사이가 나빠져 서로 미워하게 되면 치유할 길 없는 사나운 분노가 날뛰게 되지요.

이아손 : 여인이여, 당신의 날카로운 혀가 불러일으키는 폭풍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소. 당신이 하도 당신의 공적을 치켜세우기에 하는 말인데, 내 항해에서 나를 구해준 것은 신들과 인간들 중에서 오직 퀴프리스(아프로디테의 별명) 뿐이었다고 나는 생각하오. 당신이 날카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에로스가 나를 구해주도록 피할 길 없는 화살들로 당신을 강요했다는 말은 당신으로서는 듣기 싫겠지요... 하지만 어디서 당신이 나를 도와주었든 그것은 고마운 일이었소. 그러나 당신이 나를 구해준 대가로,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다는 것을 내가 당신에게 보여 주겠소. 첫째, 당신은 야만족의 나라에 사는 대신 헬라스 땅에서 살고 있고, 정의를 배웠으며, 폭력을 멀리하고 법을 사용하는 것을 배웠소. 다음, 모든 헬라스인들이 당신이 영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당신은 명성을 얻었소... 당신은 또 공주와의 결혼을 비난하는데, 그 점에서 나는 먼저 내가 현명했다는 것을, 다음에는 품행이 방정했다는 것을, 다음에는 당신과 내 자식들에게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을 보여 주겠소... 헤어날 길 없는 고생 자루들을 잔뜩 짊어지고 내가 이올코스 땅에서 이곳(코린토스)으로 옮겨 왔을 때 추방자인 나에게 공주와의 결혼보다 더한 횡재가 어디 있었겠소? 그것은 당신이 분개하고 있듯이 당신과의 결혼에 싫증이 나서도 아니고, 새 장가를 들고 싶어 안달이 나서도 아니며, 또 자식이 많은 사람들과 경쟁하고 싶어서도 아니오... 이 점이 가장 중요하오. 우리가 잘살고 궁하지 않기 위해서요. 가난한 사람은 친구들도 모두 피해버린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나는 자식들을 내 가문에 어울리게 양육하고, 당신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에게 형제를 붙여 주고, 그들을 모두 동등한 지위에 올려 놓고, 그들을 모두 한 씨족으로 묶음으로써 행복해지고 싶었소. 당신에게 아이들은 더 필요 없을 것이오. 하지만 나는 태어날 아이들로 이미 태어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소. 이게 잘못된 생각이오?... 당신들 여자들은 결혼생활만 원만하면 모든 걸 다 갖고 있다고 생각하고, 결혼생활이 여의치 않으면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아름다운 것조차 가장 적대적인 것으로 여기지요. 사람들이 다른 방법으로 자식들을 낳고, 여자 같은 것은 없어져 버렸으면 좋으련만! 그러면 인간들에게도 불행이라는 것이 없어질 텐데!

코로스장 : 이아손님, 그대는 구변이 참 좋으시네요.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솔직히 말해, 그대가 아내를 배신한 것은 잘한 짓은 아닌 듯한데요.

메데이아 : 악당인 주제에 말만 그럴싸하게 늘어놓는 자야말로 가장 엄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요. 그는 자신의 말로 불의를 감출 수 있음을 뽐내며 못된 짓을 감행하지만, 실은 그다지 현명한 편은 못 돼요... 내 말 한마디에 당신은 쓰러지고 말 테니. 당신이 진실로 악당이 아니라면 가족들에게 비밀로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나를 설득한 후에 결혼했어야죠.

이아손 : 내가 당신에게 결혼에 관해 말했더라면, 당신이 잘도 내 계획을 따라 주었겠소. 지금도 마음속으로 격렬한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주제에... 잘 알아두시오. 내가 지금 아내로 맞는 공주와 결혼하는 것은 여색을 탐해서가 아니라, 앞서도 말했듯이 당신을 구하고 내 자식들에게 왕족의 피를 받은 형제자매를 낳아 주어 우리 집안의 울이 되게 하려는 것이란 말이오.

메데이아 : 고통만 안겨 줄 뿐인 행복한 생활과, 마음을 갉아먹는 富는 내게 필요 없어요.

이아손 : 생각을 바꿔야만 더 현명해 보이리라는 것을 왜 모르시오? 좋은 것이 당신에게 고통스러워 보여서는 안 될 것이오. 당신은 또 행복하면서도 불행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될 것이오.

메데이아 : 실컷 조롱하시구려! 당신에게는 피난처가 있으니까. 그러나 나는 의지가지없이 이 나라를 떠나야 해요.

이아손 : 그것은 당신이 택한 것이오.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마시오!

메데이아 : 내가 뭘 어쨌기에? 내가 남편을 배신하기라도 했나요?

이아손 : 당신은 이 나라 왕가에 심한 저주의 말을 했잖소?...

메데이아 : 결혼하세요. 하지만 장담하건대, 당신은 결혼은 하되, 두고두고 후회하게끔 결혼하게 될 거예요.

(아네테 왕 아이게우스, 시종들을 데리고 등장)

아이게우스 : 평안하시오, 메이디아! 친구 사이에 이보다 더 휼륭한 인사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오.

메데이아 : 지혜로운 판디온의 아들 아이게우스! 그대는 어디서 이 나라의 들판으로 오시는 길인가요?

아이게우스 : 포이보스의 유서 깊은 신탁소(델포이)를 떠나 오는 길이오.

메데이아 : 무슨 일로 그대는 예언하는 대지의 배꼽(델포이)으로 가셨던가요?

아이게우스 : 어떻게 해야 내게 자식이 생길지 물어 보려고요... 그런데 그대는 왜 눈빛이 침울하고 안색이 초췌하시오?

메데이아 : 아이게우스님, 내 남편은 천하에 몹쓸 남편이에요.,, 나는 해롭게 하지 않았는데 이아손이 내게 부당한 짓을 하는군요.

아이게우스 : 그가 무슨 짓을 했다는 거요? 더 분명히 말해보시오.

메데이아 : 그가 나 대신 다른 여자를 집안의 안주인으로 얻었어요.

아이게우스 : 그가 감히 그런 수치스러운 짓을 했단 말이오?

메데이아 : 그래요. 전에 사랑받던 나는 아무런 권한도 없어요.

아이게우스 :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이오, 그대와의 잠자리가 싫어진 것이오?

메데이아 : 그는 뜨거운 사랑에 빠져 친구들을 배신했어요.

아이게우스 : 그는 꺼져 버려라! 그가 그대의 말처럼 악당이라면.

메데이아 : 그가 사랑에 빠진 것은 왕가와 인척관계를 맺기 위해서예요.

아이게우스 : 누가 그에게 딸을 주었지요? 이야기를 마저 해보시오!

메데이아 : 코린토스 땅을 통치하시는 크레온님이요.

아이게우스 : 그렇다면 그대가 괴로워하는 것도 이해가 가오, 부인!

메데이아 : 나는 망했어요. 게다가 이 나라에서 추방당했어요.

아이게우스 : 누구에 의해? 그대는 또 다른 불행을 이야기하는구려.

메데이아 : 크레온님이 나를 추방자로서 코린토스 땅에서 내쫓으세요.

아이게우스 : 이아손이 그걸 용납하던가요? 그것도 나는 칭찬할 수 없소.

메데이아 : 말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 그의 뜻이었어요. (메데이아, 아이게우스 앞에 쓰러진다) 내 그대의 수염과 두 무릎을 잡고 탄원자로서 간청해요. 제발 이 불운한 여인을 불쌍히 여기시어 나를 그대의 나라에, 그대의 화롯가에 받아 주세요! 그리하여 자식들에 대한 그대의 소망도 신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그대 자신도 죽음을 맞게 될 때까지 행복하게 사시기를! 그대가 여기서 어떤 횡재를 하셨는지 아직은 모르실 거예요. 나는 그대가 무자식의 처지에서 벗어나도록 자식들을 낳게 해드리겠단 말이에요. 그런 약들을 내가 알고 있어요.

아이게우스 : 여러 가지 이유에서 나는 그대에게 그런 호의를 베풀고 싶소, 부인! 첫째는 신들 때문이오. 다음은 그대가 낳게 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자식들 때문이오. 사실 내 모든 생각은 그쪽을 향하고 있소. 하지만 내 계획은 이러하오. 그대가 내 나라에 오면 나는 당연히 손님인 그대를 보호해주려고 노력할 것이오... 하지만 이 나라를 그대가 제 발로 떠나도록 하시오. 이방인들에게도 나는 비난받고 싶지 않소이다.

메데이아 : 그러세요. 그러시겠다고 그대가 보증만 해주신다면 나는 그대에게서 원하는 것을 다 받는 셈이니까요.

아이게우스 : 나를 못 믿겠단 말이오? 아직도 뭐가 문제지요?

메데이아 : 나는 그대를 믿어요. 하지만 펠리아스家는 나를 적대시하고, 크레온님도 마찬가지예요. 그대가 맹세에 묶이시면 그들이 그대 나라에서 나를 끌고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죠...

아이게우스 : 그대는 무척이나 신중하시구려. 나는 거절하지 않겠소. 그대의 적들에게 정당한 핑계를 댈 수 있다면. 나로서도 더없이 안전할 것이고 그대도 든든할 것이오. 맹세할 신들의 이름을 말하시오!

메데이아 : 가이아와, 내 아버지의 아버지이신 헬리오스와, 그 밖에 모든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하세요!...

아이게우스 : 가이아헬리오스의 찬란한 빛과 모든 신들의 이름으로 맹세하노니, 나는 그대가 말한 것을 지키겠소이다...

메데이아 : 편히 가세요. 모든 일이 잘 되었으니까요. 나는 결심한 바를 행하고, 원하는 바를 이룬 뒤 되도록 빨리 그대의 도시로 달라갈 거예요.

(아이게우스, 시종들을 데리고 퇴장)

코로스 : 호송의 신이신 마이아의 아드님(헤르메스)께서 그대를 집으로 데려다 주시기를! 그리고 그대가 마음속으로 바라는 일이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그대야말로, 아이게우스님, 나에게는 고결한 남자로 여겨지니까요.

메데이아 : 오오, 제우스여, 제우스의 따님이신 디케여, 그리고 헬리오스! 이제 나는 궤도에 올랐으니 내 원수들에게 당당하게 승리를 거두게 될 거예요. 친구들이여! 이제는 분명 내 원수들이 벌 받게 될 것 같아요. 꼼짝없이 궁지에 몰린 나에게 아이게우스님이 내 모든 계획의 항구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말이에요. 내가 팔라스(아테네 여신의 별명)의 도시와 성채에 다다르게 되면, 그 분에게 나는 뱃고물의 밧줄을 맬 거예요... (유모에게) 자, 그대는 가서 이아손을 데려와요.

(이아손, 유모와 함께 등장)

이아손 : 내게 무슨 용건이 있소, 여인이여. 그대 비록 내 적이지만 나는 당신의 말을 듣는 것조차 거절하지는 않겠소.

메데이아 : 이아손님, 부탁이에요. 내가 아까 한 말을 용서해 주세요... 그동안 나는 나 자신과 상의를 했고, 나 자신을 나무랐어요. '바보같이, 나는 왜 내게 호의를 가진 이들에게 화를 내며 미친 듯이 대들고, 왕가의 남편을 적대시하는 거지? 그이는 공주와 결혼해 내 아들들에게 형제들을 낳아 줌으로써 내게 가장 유익한 일을 하려는데 말이야...' 이렇게 생각하게 되자, 내가 어리석었고 공연히 화를 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이제는 당신이 우리를 위해 한 것이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해요. 내가 어리석었어요. 나는 마땅히 당신 계획에 동참해 수행을 거들고 침상 가에 다가가서 당신 신부에게 시중드는 것을 기쁘게 여겼어야 했어요... 내가 양보하고, 그 때는 내가 어리석었음을 인정할게요. 허나 지금은 그 점에 대해 더 나은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얘들아, 이리 나오너라! 아버지께 인사 드리거라...

이아손 : 여인이여, 이번 일을 나는 칭찬하오. 앞서 있었던 일도 나무라지 않겠소. 남편이 몰래 새 장가를 드는데 세상에 화내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소! 하지만 당신은 좋은 방향으로 마음을 고쳐 먹었소. 뒤늦게나마 내 계획의 유익한 점을 알았으니 말이오. 그것이 현명한 여자의 처신인 것이오. 얘들아, 너희들을 위해서는 이 아비가 무심하지 않고 신들의 도움으로 여러 가지 살아남을 방도를 생각해 두었다. 생각건대, 이 코린토스 땅에서 너희들은 앞으로 너희들의 형제들과 더불어 제일인자들이 될 것이다. 번창하라!... 그런데 당신은 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요? 어째서 당신은 애들을 위해 그다지도 탄식하는 거요?

메데이아 : 나는 애들을 낳았어요... 이 나라의 국왕께서 나를 추방하려 하시고, 나는 추방자로서 이 나라를 떠나겠어요. 하지만 자식들은 당신이 손수 양육할 수 있도록 이 나라에서 추방하지 말아 달라고 크레온님께 간청해보세요!

이아손 : 내가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소. 아무튼 한 번 해 보겠소.

메데이아 : 그럼 당신의 새 아내를 시켜 그녀의 아버지께 부탁하게 하세요. 애들은 이 나라에서 추방하지 말아 달라고.

이아손 : 좋소. 그녀를 설득할 수 있을 것이오. 그녀도 다른 여인들과 다를 바 없다면 말이오.

메데이아 : 나도 이 일에서 당신을 거들게요. 나는 그녀에게 오늘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자신할 수 있는 선물들을, 곱게 짠 옷과 황금 머리띠를 애들 손에 들려 보낼 거예요... (하녀가 장신구를 갖고 등장) 얘들아, 너희들은 이 결혼선물들을 축복받은 왕가의 신부께 갖다 드리도록 하거라! 그녀는 결코 하찮은 선물들을 받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아손 : 바보같이, 왕가에 옷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하시오, 황금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하시오? 당신이 간직하시오. 아내가 진실로 나를 존경할 만하다고 여긴다면 재물보다는 나를 더 존중할 것임을 내가 알기에 하는 말이오.

메데이아 : 그런 말씀 마세요. 선물에는 신들도 동한다는 말이 있어요. 인간들에게는 천 마디 말보다 황금이 더 힘이 있어요... 그녀는 젊은 공주예요. 내 자식들의 추방을 막기 위해서라면 황금이 아니라 내 목숨인들 못 내놓겠어요! 자, 얘들아, 너희들은 아버지의 젊은 아내에게 이 나라에서 추방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빌며 장신구를 바치도록 하라. 가장 유의해야 할 점은 그녀가 이 선물들을 손수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거라.

(이아손, 가정교사, 아이들 퇴장)

코로스 : 아아, 가련한 자여, 왕가의 불운한 사위여. 그대는 영문도 모른 채 아이들의 목숨에 파멸을, 아내에게 가증스런 죽음을 안겨 주는구나. 가련한 자여, 그대는 자신의 운명도 모른 채 얼마나 헤매고 있는가!...

(가정교사,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온다)

가정교사 : 마님, 아이들은 추방을 면했고, 선물들은 왕가의 신부가 기꺼이 손수 받았어요.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받은 셈이죠.

메데이아 : 아아, 슬프도다!

가정교사 : 그런 반응은 내가 전해드린 소식과는 맞지 않아요.

메데이아 : 그대는 전할 것을 전했소. 나는 울지 않을 수 없구려! 신들과 내가 이 나쁜 계획을 생각해냈으니까... 허사로구나, 내가 너희들을 양육한 것도! 허사로구나, 내가 너희들을 낳느라 심한 진통을 겪었던 것도!... 내가 내 자식들을 웃음거리가 되도록 내 원수들에게 넘겨 주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모인 내가 죽일 거야!... 왕가의 신부는 죽어가고 있어...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해야지. 자, 얘들아 어미에게 너희들의 손을 다오... 이 귀여운 손, 이 귀여운 입!... 너희들은 행복하게 살아라. 하지만 그곳에서다! 이곳에서의 행복은 너희들의 아버지가 빼앗아 버렸으니까... 내가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는지 나는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내 격분이 내 이성보다 더 강력하니, 격분이야말로 인간들에게 가장 큰 재앙을 안겨 주는 법.

코로스 : 벌써 몇 번씩이나 나는 섬세한 사색의 길을 걸어보았고, 여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문제들을 규명해보려 했지요...

메데이아 : 친구들이여, 나는 아까부터 결과를 기다리며 일이 어떻게 끝날지 저쪽을 바라보고 있어요. 저기, 이아손의 하인 한 명이 이리로 오고 있는 것이 보여요. 숨을 헐떡이는 것을 보니 그는 나쁜 소식을 전해줄 것 같아요.

(사자 등장)

사자 : 그대는 천륜을 어기고 끔찍한 짓을 저질러 놓았어요. 메데이아님, 자, 어서 달아나세요. 배를 타시든, 육지를 구르는 마차를 타시든.

메데이아 : 대체 무슨 일이 생겼기에 그렇게 달아나라는 게요?

사자 : 방금 젊은 공주(글라우케)가 죽었어요. 그리고 그녀를 낳은 크레온님도요. 그대의 독 때문에.

메데이아 : 가장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니, 앞으로 나는 그대를 내 은인으로, 내 친구로 여길 것이오.

사자 : 뭐라 했소? 그대는 왕가의 화로를 모독해 놓고도 그것을 듣고 기뻐하고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니, 제정신이란 말이오?

메데이아 : 그들은 어떻게 죽었나요? 그들이 더없이 비참하게 죽었다면, 그대는 나를 두 배로 기쁘게 해줄 것이오.

사자 : 그대의 두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와서 신부의 집에 들어섰을 때, 그대의 불행을 동정하던 우리 하인들은 마음이 흐믓했소... 나는 기쁜 나머지 여인들의 방으로 아이들을 따라 들어갔소... 아이들이 들어오자 공주는 이를 못마땅히 여기고는 눈을 가린 채 창백해진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려 버리는 것이었소. 그러자 그대의 남편께서 젊은 아내의 노여움과 분노를 이런 말로 가라앉히려 하셨소. "친구들을 미워하지 마시오. 노여움을 풀고 이쪽으로 얼굴을 돌리시오. 남편이 친구로 여기는 자들을 그대도 친구로 여기시오. 자, 이 선물들을 받고, 이 아이들을 추방에서 풀어 달라고 아버지께 간청해주시오. 나를 위해서!" 그녀는 장신구를 보자 더는 버티지 못하고 남편에게 모든 것을 승낙하고는... 오색찬란한 옷을 집어 몸에 두르고, 곱슬머리에는 황금 머리띠를 두르더니 번쩍이는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매만지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향해 미소 지었소... 하지만 다음 순간 끔찍한 광경이 벌어졌소. 그녀는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사지를 떨며 뒤로 비틀거렸고, 바닥에 넘어지기 전에 간신히 한발 앞서 의자에 쓰러질 수 있었으니 말이오...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흰 거품이 나오고 눈알이 뒤집히고 얼굴에 핏기가 없는 것을 보자, 지체없이 하녀들 가운데 일부는 아버지의 집으로, 일부는 새로 결혼한 남편에게 신부의 불행을 알리러 갔소... 이중의 파멸이 그녀를 엄습했던 것이니, 머리에 두르고 있던 황금 머리띠에서는 놀랍게도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불길이 흘러내렸고, 고운 곳은 그 불행한 여인의 하얀 살을 파먹어 들어갔소... 그녀는 불행에 제압되어 바닥에 쓰러졌고, 그녀의 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그녀를 알아볼 수 없었소. 그녀의 두 눈이 있던 자리와 고운 얼굴이 더 이상 분명하지 않았으니까요...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소. 모두들 겁에 질려 감히 누구도 그녀의 시신을 만지려 하지 않았소... 그런데 가련한 아버지가 불행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른 채 집안으로 달려 들어왔다가 시신 위에 쓰러져 즉시 통곡하고 포옹하고 입 맞추며 이렇게 말했소. "이 가엾은 것아, 대체 신들 중에 어느 분께서 너를 이토록 참혹하게 죽이셨느냐? 누가 무덤가에 서 있는 이 늙은이한테서 너를 빼앗아 가는 것이냐? 아아, 너와 함께 죽고 싶구나, 애야!" 비탄과 통곡을 그치고 나서 그는 노구를 일으켜 세우려 했소. 하지만 그는 마치 담쟁이덩굴이 월계수 가지들에 달라붙듯, 그 고운 옷에 달라붙었소. 그래서 무서운 씨름이 시작되었소. 그는 무릎을 세우고 일어서려 했고, 그녀는 꽉 붙들었소. 그리고 그가 억지로 당기자 그의 늙은 살이 뼈에서 찢어지는 것이었소. 마침내 그가 포기하자 가련하게도 목숨이 그의 곁을 떠나고 말았소... 그리하여 딸과 늙은 아버지가 시신이 되어 나란히 누워 있으니. 실로 눈물겨운 불행이 아닐 수 없소. 그대의 운명에 관해서는 대 더 말하지 않겠소. 어떻게 해야 벌을 피할 수 있을지 그대 스스로 알고 있을 테니 말이오. 필멸의 존재들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음을 오늘 처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내 거리낌 없이 말하겠소. 스스로 현인이요 사색가라고 자부하는 자들이야말로 가장 중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이오. 富가 흘러 들어가는 사람도 남들보다 행운아라고는 할 수 있으나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오.

(사자 퇴장)

코로스장 : 오늘 신께서 이아손님에게 수많은 불행을 안겨 주시는 것 같은데, 이는 당연한 응보지요. 아아, 크레온님의 가련한 따님(글라우케)이여, 그대가 이아손님과의 결혼 때문에 하데스의 집으로 가니, 우리는 그대의 불행에 연민의 정을 느껴요.

메데이아 : 친구들이여, 내 결심은 확고해요. 나는 되도록 빨리 내 자식들을 죽이고 나서 이 나라를 떠날 것이며, 늑장을 부리다가 더 증오심에 찬 다른 손에 내 자식들을 죽이라고 내주지 않을 거예요. 그 애들은 무조건 죽어야 해요. 필요하다면 생모인 내가 그 애들을 죽일 테야. 자, 내 마음이여, 무장하라! 내가 왜 주저하는 거지? 끔찍하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범행이 아니던가!...

(메데이아, 집안으로 퇴장)

코로스 : 가이아와 만물을 비추는 헬리오스의 빛이여, 굽어살피소서. 파멸을 안겨 주는 여인을! 그녀가 제 혈육을 죽이려고 피투성이가 된 손을 들기 전에!... 가련한 여인이여, 어인 일로 무서운 원한과 적의에 찬 살의가 그대의 마음을 엄습하는가? 제 혈육에 대한 범행은 지상의 인간들에게 가혹한 벌을 가져다 주는 법. 제 혈육을 살해한 자들에게 걸맞은 재앙이 신들에 의해 그들의 집에 떨어진다네.

한 아이 : (집안에서) 도와줘요!

코로스 : 들리나요, 아이들의 저 비명이? 아아, 가엾어라! 아아, 불운한 여인!

첫째 아이 : (집안에서) 난 몰라요, 형님! 우리는 끝장났어요... 제발 우리를 살려 주세요. 우린 도움이 필요해요!

둘째 아이 : (집안에서) 벌써 칼의 덫이 죄어들고 있어요!

코로스 : 가엾어라! 그대는 아마도 돌이나 무쇠로 만들어진 모양이구려. 제 몸에서 낳은 제 자식들을 제 손으로 죽이려 하다니!...

(이아손이 허둥지둥 뛰어 들어온다)

이아손 : 여인들이여, 그런 끔찍한 짓을 저지른 메데이아라는 여인이 아직 집안에 있소, 아니면 벌써 달아나 버렸소? 그녀가 왕가에 죄값을 치르지 않으려면 땅속에 숨거나, 아니면 날개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야만 할 테니 말이오. 이 나라의 통치자들을 죽여 놓고도 그녀는 자신이 이 집에서 무사히 도망칠 수 있기를 바라는가? 하지만 내가 염려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내 자식들이오... 내가 달려온 것은 내 아들들의 목숨을 구하려 함이오. 왕가의 친척들이 그 어미의 무도한 살인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그 애들을 헤치지 못하도록 말이오.

코로스장 : 가련한 이아손님, 그대가 어떤 불행 속으로 뛰어들었는지 모르고 계시군요. 아신다면 그런 말씀은 안 하실 텐데.

이아손 : 무슨 일이오? 그녀가 나까지 죽이려 하오?

코로스장 : 그대의 아이들은 어머니 손에 죽었어요.

이아손 : 아아, 그게 무슨 말이오? 그대가 나를 죽이는구려, 여인이여!... 대체 어디서 그녀가 애들을 죽인 거요? 집 안이오, 밖이오?

코로스장 : 문을 여시면 아이들의 주검을 보시게 될 거예요.

이아손 : 어서 빨리 빗장을 벗기도록 하라, 하인들아!... 죽은 아이들과 그녀를 볼 수 있도록. 내 그녀에게 복수하련다.

(메데이아가 아이들의 시신을 안고 용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지붕 위에 나타난다)

메데이아 : 당신은 어인 일로 문을 부수면서 시신들과 나를 찾는 건가요? 헛수고하지 마세요... 손으로 나를 잡지는 못할 거예요. 내 아버지의 아버지이신 헬리오스께서 내게 적의 손을 막아 줄 이런 수레를 주셨으니 말이에요.

이아손 : 아아, 가증스러운 인간이여! 신들과 나와 모든 인간 종족에게 가장 미움받는 여인이여! 감히 제 자식들의 가슴에 칼을 꽂아 죽이고 자식들을 빼앗음으로써 나까지 파멸케 하다니! 그런 가장 불경한 짓을 감행하고도 태양과 대지를 보다니, 죽으시오! 이제야 알겠소,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소. 아버지와 조국을 배반한 당신을 나는 당신의 고향 야만족의 나라에서 헬라스의 집으로 큰 재앙으로서 데려왔던 것이오. 당신의 악행을 응징할 악령을 신들께서 내게 지우셨던 것이오. 아르고號에 오르기 전에 당신은 오라비(압시르토스)를 죽였으니 말이오. 그게 시작이었소. 그러고 나서 당신은 나와 결혼해 내게 아이들을 낳아 주더니, 내가 새 장가를 든다고 아이들을 죽여 버렸소. 어떤 헬라스의 여인도 감히 그런 짓은 할 수 없을 것이오... 당신은 암사자이지 여인이 아니며, 튀르레니아 땅에 사는 스퀼라보다 천성이 더 모질구려... 꺼지시오! 후안무치한 여인이여, 제 자식을 죽인 여인이여!...

메데이아 : 당신이 나와의 결혼을 배신하고 나를 조롱거리로 삼으며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안 될 일이에요. 그리고 공주(글라우케)와의 결혼을 주선한 크레온이 이 나라에서 나를 추방하고도 벌 받지 않는다는 것도 안 될 일이에요... 내가 당신의 심장을 가격한 것은 당연한 응보예요.

이아손 : 당신도 슬퍼하며 내 고통을 함께 하고 있지 않은가!

메데이아 : 잘 알아둬요. 당신이 날 조롱하지 못한다면 내겐 고통도 덕이 돼요.

이아손 : 얘들아, 너희들은 사악한 어머니를 만났구나!

메데이아 : 얘들아, 아버지의 악덕이 너희들을 죽인 것이다!

이아손 : 애들을 죽인 것은 분명 내 오른손이 아니었소.

메데이아 : 그대의 교만과 새 장가가 그랬죠.

이아손 : 정녕 그대는 새 장가 때문에 애들을 죽이기로 작정했단 말이오?

메데이아 : 남편의 새 장가가 여자에게 작은 고통이라 생각하시나요?

이아손 : 슬기로운 여자에게는. 하지만 당신은 완전히 타락했소...

메데이아 : 누가 이 고통의 장본인인지 신들께서는 알고 계세요...

이아손 : 내가 그 시신들을 묻어 주고 곡할 수 있게 해주시오!

메데이아 : 천만에! 나는 애들을 아크로폴리스에 거주하시는 헤라 여신의 성역으로 데려가 내 손으로 묻어 줄 거예요. 어떤 적도 애들을 능욕하고 무덤을 파헤치지 못하도록. 그리고 나는 이 불경한 살인을 속죄하기 위해 앞으로 여기 이 시지포스의 나라(코린토스)에서 신성한 축제와 제사를 올리게 할 거예요. 하지만 나는 에렉테우스의 나라(아테네)에 가서 판디온의 아들 아이게우스의 집에서 살 거예요. 당신은 당연한 응보로, 아르고號의 파편에 머리가 박살 나 악인답게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될 거예요. 허나 그 전에 당신은 나와의 결혼의 쓰라린 종말을 보게 될 거예요.

이아손 : 하지만 애들의 복수의 여신과 살인을 응징하시는 디케 여신께서 당신을 죽이시게 되기를!

메데이아 : 하지만 거짓 맹세를 하고 친구를 속인 당신에게 신이든 신령이든 누가 귀를 기울이겠어요?

이아손 : 아아, 제 자식을 죽인 흉악한 계집 같으니라고!

메데이아 : 집에 가서 신부나 묻어 주세요!

이아손 : 아이를 둘 다 잃고 가야 하다니!

메데이아 : 당신의 비탄은 아직 멀었어요. 늙을 때까지 기다리세요!

이아손 : 아아, 더없이 사랑스런 아이들아!

메데이아 : 어미에게는 그랬지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그렇지 않았어요.

이아손 : 그런데 애들을 왜 죽였소?

메데이아 : 당신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서죠.

이아손 : 아아, 가련한 내 신세! 아이들의 사랑스러운 입에 입 맞추고 싶구나!

메데이아 : 지금은 당신이 애들에게 말을 걸고, 지금은 다정하게 인사하지만 아까는 배척했어요.

이아손 : 신들의 이름으로 빌겠소. 애들의 부드러운 살갗을 만져 볼 수 있게 해주시오!

메데이아 : 안 돼요. 말해도 소용없어요.

이아손 : 오오, 제우스여. 내가 어떻게 내쫓기는지, 제 자식을 죽인 흉악한 저 암사자에게 내가 어떤 수모를 당하는지 들으셨나이까?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가지 뿐. 그것은 내가 통곡하며, 어떻게 당신이 내 자식들을 죽이고는 내 손으로 시신들을 만져 보고 묻어 주는 것조차 거절하는지 신들을 증인으로 부르는 것이오. 아아, 내가 지식들을 낳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당신 손에 자식들이 죽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코로스 : 제우스께서는 많은 것을 주관하시고, 신들께서는 많은 것을 예상과 다르게 이루시지요. 우리가 바라던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하면, 바라지도 않았던 것을 위해 신께서는 길을 찾아내시지요. 여기 이 사건도 그렇게 일어난 것이라오.

6.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 - 에우리피데스.

일설에 따르면,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아울리스 항에서 순풍을 얻기 위해 그리스군에 의해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제물로 바쳐졌지만, 마지막 순간 아르테미스가 사슴을 대신 넣어 주고 그녀를 구출해 지금의 크림반도에 살던 타우로이족의 나라(타우리케)로 데려가 그곳에 있던 그녀의 신전에서 여사제로 봉사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방인을 여신께 제물로 바치는 그곳의 관습에 따라 제물을 축성하는 일을 맡아보던 이피게네이아는 자신을 무자비하게 제물로 바친 그리스인들을 늘 원망하면서도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러던 중 그리스 젊은이 두 명이 붙잡혀 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끌려 오는데, 그들은 아폴론의 명령에 따라 그곳의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그리스로 가져가려고 온 그녀의 오라비 오레스테스와 그의 친구 필라데스. 고향에 편지를 전해주면 한 사람을 살려주기로 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그녀가 편지의 내용을 읽어 주다가 둘이 남매간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어머니를 죽인 살인자인 두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신상을 만진 만큼 신상도 제물도 바닷물로 세정해야 한다며 타우로이족의 왕을 속여서 오레스테스 일행이 타고 온 배를 타고 그리스로 탈출한다.

(장소 : 타오로이족의 나라(타우리케)에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 앞 광장)

이피게네이아 : 탄탈로스의 아드님 펠롭스(아가멤논의 할아버지)께서 피사에 가셔서 날랜 말들 덕분에 오이노마오스의 따님과 결혼하시자, 그녀에게서 아트레우스께서 태어나셨고, 아트레우스의 아드님이 곧 메넬라오스아가멤논이에요. 그리고 나 이피게네이아아가멤논과 틴다레오스의 딸(클레타임네스트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예요. 에우리포스 해협이 검푸른 물결을 끊임없이 세차게 굴리는 소용돌이치는 바닷가에서, 아울리스 항의 이름난 만(灣)에서 내 아버지께서 헬레네를 위해 아르테미스 여신께 나를 제물로 바치셨다고 사람들은 믿고 있지요. 그곳으로 아가멤논 왕께서 1천 척의 헬라스 함대를 모으셨기 때문인데, 이는 아버지께서 아카이오이족(그리스인들)을 위해 일리온(트로이아)을 이겨 승리의 아름다운 화관을 쟁취하시고 헬레네의 간통죄를 벌주심으로써 메넬라오스를 기쁘게 해주시기 위함이었지요. 그러나 바람이 불지 않아 함대가 출항할 수 없게 되자 아버지께서 구운 제물을 바쳐 신의(神意)을 알아보게 하셨고, 칼카스가 이렇게 말했지요. "헬라스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이여, 아르테미스께서 그대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받기 전에는 한 척의 배도 출항하지 못할 것이오. 일찍이 그대는 광명의 여신(아르테미스)께 그 해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바치겠다고 서약하셨거늘, 그때 그대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집에서 그대에게 딸을 낳아 주었소. 그러니 그대는 그 딸을 제물로 바쳐야 하오." 그리하여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킨다는 오디세우스의 속임수가 나를 어머니 품에서 끌어냈지요. 나는 아울리스에 도착해 가련하게도 제단에 올려졌고, 칼에 맞아 죽게 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아르테미스께서 나를 빼돌리신 뒤 나 대신 암사슴 한 마리를 아카이오이족에게 주시고는 밝은 하늘을 지나 이곳 타우로이족의 나라(타우리케)에 나를 데려나 놓으셨어요. 이 나라에서는 토아스라는 야만인이 야만족을 통치하고 있는데, 날개 달린 듯 걸음이 잰 그는 잰걸음 덕분에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가 이 신전에 나를 여사제로 앉혔지요. 이곳에서 아르테미스 여신께서는 제물의 축제를 즐기고 계신데, 그것은 이름만 아름다울 뿐이지, 도시의 관습에 따라 이 나라로 표류해오는 모든 헬라스인을 제물로 바쳐야 하니까요. 물론 나는 축성(祝聖)만 할 뿐이고, 제물 바치는 일은 남자들 소관이지만...

(이피게네이아 퇴장. 오레스테스필라데스 은밀히 다가온다)

오레스테스 : 주의해서 잘 보게. 아무도 우리와 마주치지 않도록!

필라테스 : 유심히 살펴보고 있네. 사방으로 눈을 돌리며!

오레스테스 : 필라데스, 자네는 이곳이 우리가 아르고스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찾아온 그 신전이라고 믿나?

필라테스 : 물론이지, 오레스테스. 그 점은 자네도 의심하지 말게.

오레스테스 : 그리고 이것이 헬라스인들의 피가 뚝뚝 듣던 제단이고?

필라테스 : 재단 가장자리가 피로 발갛게 물들었군 그래.

오레스테스 : 자네 저기 저 처마 밑에 무구(武具)들이 걸려 있는 게 보이나?

필라테스 : 저 무구들은 죽은 이방인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들일세. 우리는 눈을 사방으로 굴리며 유심히 살펴보아야겠네.

오레스테스 : 오오, 포이보스(아폴론)시여, 그대의 신탁은 나를 여기서 또 덫에 걸려 들게 했나이다. 나는 어머니를 죽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뒤로 복수의 여신 무리에게 쫓기고 또 쫓겨 고향을 떠나 객지를 전전했나이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쫓겨 굽은 주로(走路)를 수없이 돌고 돈 뒤 그대를 찾아가, 어떻게 해야 광증(狂症)의 여로를 끝내고 나로 하여금 고생하며 온 헬라스를 두루 돌아다니게 했던 내 고난을 끝낼 수 있겠는지 물었나이다. 그러자 그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대의 누이 아르테미스의 제단들이 있는 타우로이족의 나라에 가서, 그곳 사람들 말로는, 하늘에서 그 신전으로 떨어졌다는 여신의 신상을 빼앗되, 행운으로든 지략에 의해서든 여신상을 손에 넣게 되어 내 모험의 극치로서 아테나이인들의 나라에 여신상을 가져다 주면 이 행위가 나를 고난에서 구원해줄 것이라 하셨나이다. 그래서 나는 그대의 말씀에 따라 이곳 낯설고 나그네에게 불친절한 나라에 온 것이옵니다... 필라데스, 높은 담이 신전을 둘러싸고 있으니, 사다리를 타고 기어오를까? 하지만 어떻게 들키지 않을 수 있겠어? 아니면 청동으로 만든 빗장들을 쇠지레로 부술까? 하지만 우리는 빗장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잖아. 그리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다 잡히는 날에는 우리는 죽은 목숨일세. 그러니 죽기 전에 우리가 이리로 타고 온 배가 있는 곳으로 도망치도록 하세.

필라테스 : 도망치다니! 그건 용납할 수 없고 우리답지 않은 짓일세. 신전을 떠나 검은 바다의 파도에 씻기는 동굴에 숨되, 배에서 떨어진 곳에 숨도록 하세... 하지만 어두운 밤이 되면, 그때는 용기를 내어 갖은 수단을 다 써서 신전에서 여신상을 가져가야 할 것이네... 용감한 자들은 위험을 무릅쓰지만, 비겁한 자들은 아무 데도 쓸모가 없다네. 우리가 배를 타고 이토록 먼 바닷길을 온 것은 목적지 바로 앞에서 되돌아가기 위함이 아니었네.

오레스테스 : 좋은 충고를 해주었네. 내가 따르겠네. 몸을 숨길 만한 장소를 찾아보도록 하세. 신께서 자신의 신탁이 무용지물이 되도록 내버려 두시지는 않을 걸세. 용기를 내자고! 젊은이들에게는 힘들다는 것이 변명이 될 수 없어.

(오레스테스필라데스 퇴장. 포로로 잡힌 그리스 여인들로 구성된 코로스가 등장하고, 이피게네이아가 신전에서 나온다)

이피게네이아 : 그대들은 경건히 침묵하라. 손님에게 불친절한 바다(흑해)맞부딪치는 쌍바위(쉼플레가데스) 가까이 사는 이들이여!

코로스 : 오오, 레토의 따님(아르테미스)이시여... 1천 척의 함대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사를 이끌고 트로이아의 성탑들로 가신 분(아가멤논)의 따님이여, 그대 이름난 아트레우스家의 자손이여!

이피게네이아 : 오오, 하녀들아. 나는 말할 수 없는 슬픔에, 즐거운 리라에는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의 만가(輓歌)에 빠져 있단다. 아아, 사랑하는 가족을 애도하며, 내게 재앙이 닥쳐 죽은 오라비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단다. 그런 끔찍한 악몽을 꾸었으니까. 방금 이 어둠이 걷힌 간밤에. 나는 이제 끝장났어. 내 아버지 집은 없어지고, 아아, 내 집안도 사라져 버렸어! 아아, 슬프도다, 아르고스의 수난이여!

코로스 : 아아, 슬프도다. 아트레우스의 아들들의 집안이여! 선조들의 집에서 왕홀(王笏)들은 빛이 바랬다네! 행복했던 아르고스의 왕들 가운데 누구에게서 파멸이 시작되었던고? 고난에 또 고난이 겹쳤구나...

이피게네이아 : 처음부터 내게는 재앙의 악령이 주어졌지. 내 어머니의 허리띠가 풀리던 그날 밤부터. 내가 태어날 때 운명의 여신들은 처음부터 내게 잔혹한 운명을 정해주었어. 레다의 가련한 딸(클리타임네스트라)은 방에서 나를 첫아이로 낳아 지각없는 아버지를 위한 피의 제물로, 기쁨을 주지 않는 번제로 길렀으니, 나는 서약에 따라 신에게 바쳐졌던 것이지. 그리하여 사람들은 말들이 끄는 마차에 나를 태워 아울리스의 모래 해안으로 신부로서, 불행한 신부로서, 네레우스(海神)의 딸(테티스)의 아들(아킬레우스)에게 데려갔었지, 아아 슬프도다! 지금 나는 손님에게 불친절한 바다의 손님으로 황량한 곳에서 남편도 자식도 없이 고향도 친구도 없이 살아가고 있어. 결혼에 의해 헬라스인들의 나라에서 쫓겨난 채. 나는 아르고스의 헤라를 위해 노래도 부르지 않고, 신나게 덜거덩거리는 베틀 가에서 앗티케의 팔라스(아테나이의 별명)와 티탄 신족의 형상도 수놓지 않는다네. 대신 나는 수금(竪琴)도 울리지 않는 잔혹한 죽음을 위해 애처롭게 신음하고 애처롭게 우는 이방인들의 피로 제단을 더럽혀야 해. 하지만 내 오늘은 그 모든 것을 잊고 아르고스에서 죽은 내 오라비를 위해 울고 있어. 내가 떠날 때 그 애는 아직 젖먹이로서 어머니의 팔과 품에 안겨 있던 발랄하고 연약한 어린아이였지, 아르고스의 왕자 오레스테스.

(소 치는 목자, 해안에서 다가온다)

소 치는 목자 : 아가멤논클리타임네스트라의 따님이여, 내게서 방금 일어난 일을 듣도록 하세요.

이피게네이아 : 대체 무슨 일이기에 우리의 비탄을 방해하는 것이오?

소 치는 목자 : 두 젊은이가 쉼플레가데스의 검은 바위틈 사이를 무사히 통과해 이 나라에 도착했으니, 아르테미스 여신께는 반가운 제물이지요. 그러니 그대는 서둘러 성수(聖水)와, 그 밖에 제물을 바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시지요.

이피게네이아 : 그 이방인들은 어디서 왔지요? 어느 나라 옷을 입고 있나요?

소 치는 목자 : 헬라스인들이에요. 그것만 알고 그 이상은 모르겠어요.

이피게네이아 : 그 이방인들의 이름은 말해줄 수 없나요? 듣지 못했나요?

소 치는 목자 : 그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필라데스라고 불렀어요.

이피게네이아 : 그리고 그의 친구인 또 한 명의 이름은 무엇이지요?

소 치는 목자 : 아무도 몰라요. 우리는 듣지 못했어요.

이피게네이아 : 그대들은 그들을 어떻게 발견했으며, 어떻게 사로잡았지요?

소 치는 목자 : 저기 파도가 부서지는 황량한 바닷가에서요... 우리가 그 자들을 제압했지만, 그것은 용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지쳐 무릎을 꿇었을 때 우리가 그 자들을 빙 둘러싸고는 돌들로 그 자들의 손에서 칼을 빼앗았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우리는 그 자들을 국왕 앞으로 끌고 갔고, 국왕께서는 그 자들을 보시자마자 축성한 다음 제물로 바치도록 그대에게 보내셨어요...

이피게네이아 : 좋아요. 그대는 가서 그 이방인들을 이리 데려오시오. 이곳에서의 의식은 내가 알아서 준비할 것이오. (소 치는 목자, 퇴장) 오오, 가련한 내 마음이여, 너는 전에는 늘 이방인들에게 온유하고 동정심이 많았으며, 헬라스인들이 네 수중에 들어올 때마다 동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곤 했지... 불행한 사람은 제 처지가 어려운 까닭에 더 불행한 사람에게 결코 호의적일 수 없지... 아울리스에서 다나오스 백성들(그리스인들)은 나를 송아지처럼 죽였고, 나를 낳아 주신 아버지께서 사제 노릇을 하셨지. 아아, 나는 그때의 고뇌를 잊을 수가 없어... 아버지의 무릎에 매달리면서 애원한 것이 몇 번이었던가!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저를 위해 참혹한 결혼식을 정해 놓으셨군요. 아버지께서 저를 죽이시는 지금 어머니께서는 아르고스의 여인들과 함께 축혼가를 부르시고, 온 집 안에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어요. 그런데도 아버지께서는 저를 죽이시는군요. 그러니까 계략으로 저를 마차에 태워 피비린내 나는 결혼식에 데려오시려고 아버지께서 신랑이라고 하신 아킬레우스는 펠레우스의 아들이 아니라, 하데스였네요." 그때 나는 고운 면사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어린 오라비를 가슴에 안아 보지도 못했고 아우의 입에 입 맞추지도 못했어. 그런데 지금 그 애가 죽다니! 펠레우스의 집에 시집간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서, 그래서 나는 아르고스로 다시 돌아오리라 믿고 수많은 애정의 표시를 훗날로 미루었지. 오오, 가련한 오레스테스...

(오레스테스필라데스, 포박되어 끌려 온다)

코로스장 : 저기 두 사람이 손이 묶인 채 오고 있구나, 여신의 제물로서... 소 치는 목자의 보고가 거짓말이 아니었구려!

이피게네이아 : 좋아! 여신께 봉사하는 것이 내 첫 번째 임무여야 하니까. 그대들은 이방인들의 손을 풀어 주도록 하라! 그들은 신께 바쳐진 만큼 묶여 있어서는 안 되지... (포로들을 유심히 살펴보며) 아아, 그대들을 낳아 준 어머니는 누구며, 아버지는 누구일까? 또 누이가 있다면 그녀는 누구일까? 그녀는 한 쌍의 젊은이를 잃고 오라비 없는 신세가 될 운명이로구나!... 그대들은 어디서 왔는가, 불운한 이방인들이여?...

오레스테스 : 여인이여, 그대가 뉘시든 간에, 어찌 그대는 그 일을 비탄하며 우리에게 닥친 불행을 슬퍼하는 것이오?... 운명은 내버려 두어야 하오. 우리를 위해서라면 그대가 통곡할 필요가 없소. 이 나라에서의 제물에 관해서는 우리도 잘 알고 있으니 말이오.

이피게네이아 : 그대들 중에 누가 이름이 필라데스? 나는 먼저 그것이 알고 싶소.

오레스테스 : 이 사람이오. 그것을 아는 것이 즐겁다면...

이피게네이아 : 그대들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두 형제인가요?

오레스테스 : 우리는 의형제이지 친형제는 아니오, 여인이여.

이피게네이아 : 그대를 낳아 준 아버지는 그대에게 어떤 이름을 지어주었소?

오레스테스 : 불운이라고 불리어 마땅할 것이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죽으면 웃음거리는 면하겠지요... 그대가 제물로 바치는 것은 내 몸이지 내 이름이 아니오...

이피게네이아 : 그대의 고향 도시가 어딘지도 말해주지 않겠다는 거요?

오레스테스 : 그 질문은 내게 아무 이득도 되지 않소. 난 어차피 죽을 몸이오.

이피게네이아 : 무엇이 그대가 내게 그런 호의를 베푸는 것을 방해하지요?

오레스테스 : 이름난 아르고스가 내 고향 도시임을 나는 자랑으로 여기오.

이피게네이아 : 맙소사, 그대가 정말 그곳 출신이라는 말이오, 이방인이여?... 그대가 아르고스에서 왔다면, 내게는 반가운 일이오... 그대는 추방되어 고향을 떠났나요, 아니면 무슨 일이 있었지요?

오레스테스 : 어떤 의미에서는 추방되었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이피게네이아 : 그대는 아마 온 세상에 알려진 트로이아에 관해 들었겠지요?

오레스테스 : 그 도시라면 나는 꿈에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소.

이피게네이아 :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도시는 창에 파괴되어 없어졌다고 하던데.

오레스테스 : 그렇소. 그대가 들은 그대로요.

이피게네이아 : 헬레네메넬라오스의 집으로 돌아왔나요?

오레스테스 : 돌아왔지요. 우리 가족 가운데 한 명(아가멤논)에게 불행을 안겨 주며.

이피게네이아 :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지요? 그녀는 내 불행에도 책임이 있어요.

오레스테스 : 그녀는 스파르테에서 전남편과 함께 살고 있소.

이피게네이아 : 그녀는 나 뿐만 아니라 모든 헬라스인들에게 미움받고 있지요.

오레스테스 : 나도 그녀의 결혼(파리스와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호되게 당했소.

이피게네이아 : 아카이오이族(그리스인들)은 귀향했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예언자 칼카스라는 자는 트로이아에서 돌아왔나요? 칼카스는 아가멤논에게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에게 제물로 바치라고 요청한 예언자.

오레스테스 : 뮈케나이인들이 말하기를, 그는 죽었다 하오.

이피게네이아 : 라에르테스의 아들(오디세우스)은 어떻게 됐지요?

오레스테스 : 그는 아직 귀향하지 않았으나, 살아 있다고 들었소.

이피게네이아 : 그가 죽어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했으면 좋으련만!

오레스테스 : 그를 저주하지 마시오. 그는 온갖 고생을 다 하고 있으니까.

이피게네이아 : 네레우스의 딸 테티스의 아들(아킬레우스)은 살아 있나요?

오레스테스 : 죽었소. 아울리스에서의 결혼도 그에게 도움이 되지 못했소.

이피게네이아 : 그것은 속임수였으니까. 당사자들은 알고 있어요.

오레스테스 : 그대는 대체 뉘시오? 헬라스 사정에 밝은 편이로군요.

이피게네이아 : 나도 그곳 출신이오. 어릴 적에 그곳에서 사라졌지요... 행복하다고 칭송이 자자한 장군님은 어떻게 지내시오?

오레스테스 : 누구 말이오? 내가 알고 있는 그 분은 행복하지 못하시오.

이피게네이아 : 그 분은 아트레우스의 아들 아가멤논이라고 불리셨소.

오레스테스 : 나는 모르오. 그 이야기는 하지 마시오. 여인이여!

이피게네이아 : 그러지 말고 좀 말해주시오, 이방인이여. 나를 기쁘게 해주시오.

오레스테스 : 그 가련한 분은 돌아가셨고, 다른 사람(오레스테스 자신)까지 망쳐 놓으셨소.

이피게네이아 : 그 분께서 돌아가셨다고? 무슨 변고로? 가련한 내 신세!

오레스테스 : 그대가 왜 탄식하시오? 설마 그대의 친인척은 아니실 테고?

이피게네이아 : 나는 지난날 그 분의 행복을 슬퍼하는 것이오.

오레스테스 : 그 분은 아내의 손에 끔찍하게 살해되었소.

이피게네이아 : 얼마나 가련한가, 죽은 여인도, 죽은 그 분도!... 불쌍하신 그 분의 아내(클리타임네스트라)는 아직 살아 있나요?

오레스테스 : 죽었소. 그녀가 낳은 아들(오레스테스)이 그녀를 죽였소.

이피게네이아 : 아아, 집안이 쑥대밭이 되었구나! 왜 아들이 그녀를 죽였소?

오레스테스 :녀에게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갚기 위해서요.

이피게네이아 : 아아, 그는 사악하면서도 정당한 행위를 얼마나 훌륭하게 해치웠는가!

오레스테스 : 그는 정당하지만 신들께서는 그를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소.

이피게네이아 : 아가멤논에게는 집에 다른 아이가 남아 있나요?

오레스테스 : 엘렉트라라는 딸이 하나 남아 있지요.

이피게네이아 : 어때요? 제물로 바쳐진 딸(이피게네이아)에 관해서도 이야기들 하나요?

오레스테스 : 이야기라야 그녀는 죽어 햇빛을 보지 못한다는 그 정도지요.

이피게네이아 : 참 불쌍하군요. 그녀도, 그녀를 죽인 아버지도!

오레스테스 : 그녀는 사악한 여인(헬레네) 때문에 무익하게 죽은 것이오.

이피게네이아 : 고인이 된 아버지의 아들(오레스테스)은 아직도 아르고스에 사나요?

오레스테스 : 살지요, 비참하게. 도처에 살면서 어느 곳에도 살지 않아요.

이피게네이아 : 꺼져라, 거짓 꿈들아! 너희들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오레스테스 : 지혜롭다는 신들도 경박한 꿈들 못잖게 허황되지요. 인간들 사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신들 사이에서도 많은 혼란이 지배하니까요. 특히 괴로운 것은 현명한 사람이 예언자들의 말만 믿다가 파멸하는 것이오. 그가 어떻게 파멸하는지 당해본 사람은 다 알지요.

이피게네이아 : 그대들은 내 말을 들으시오! 이방인들이여, 내 그대들에게도 이익이 되고 내게도 이익이 될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같은 일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어야만 가장 확실히 성공이 보장되니까. (오레스테스에게) 내 그대를 살려 줄 터이니, 그대는 나를 위해 아르고스로 가서 그곳에 있는 내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서찰을 전해주겠소?... 여태껏 나는 아르고스로 돌아가 소식을 전하고 무사히 도착해 내 가족 중 한 명에게 내 서찰을 전해줄 사람을 아무도 찾지 못했소. 하지만 그대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것 같고, 뮈케나이아, 내가 소식을 전하려는 사람들을 알고 있으니, 내가 그대를 살려 주겠소. 그러니 그대는 가벼운 서찰 심부름의 대가로 그대의 목숨이라는 하찮다고 할 수 없는 보수를 받으시오. (필라데스를 가리키며) 하지만 이 사람은 도시가 강요하니 그대와 헤어져 여신께 제물로 바쳐져야 하오.

오레스테스 : 그대의 제안은 훌륭하오. 한 가지만 빼고, 이방인이여! 이 사람이 죽어야 한다는 것은 내게는 큰 부담이오. 내가 재앙을 향해 방향을 잡은 배의 선장이고, 이 사람은 내 고난을 동정해 동승했을 뿐이니까요. 내가 그의 파멸로 그대의 호의를 사서 나 혼자만 재앙에서 벗어난다면, 도리가 아닐 것이오. 그러니 이렇게 하시오. 그에게 서찰을 주시오. 그는 그대가 바라는 대로 서찰을 아르고스로 가져갈 것이오. 죽이려거든 나를 죽이시오. 친구를 불행에 빠뜨리고 나만 구원받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짓이오. 이 사람은 내 친구요. 나는 나 못잖게 이 사람도 햇빛을 보기를 원한단 말이오.

이피게네이아 : 오오, 더없이 고결한 마음이여! 그대는 얼마나 고귀한 가문에서 태어났는가! 그대는 친구들에게 진정한 친구요. 하나 밖에 없는 내 오라비도 이랬으면 좋으련만! 내게도 오라비가 있으니까 말이오, 이방인들이여! 비록 내 눈으로 그 애를 볼 수는 없지만. 그대의 뜻이 정 그렇다면, 나는 이 사람이 서찰을 가져가도록 보낼 것이고, 그대는 죽게 될 것이오. 그대가 친구에게 보여 주는 성의는 참으로 대단하오.

오레스테스 : 누가 나를 제물로 바치고 끔찍한 짓을 행할 것이오?

이피게네이아 : 내가. 여신을 위해 사제로서의 직무를 수행해야 하니까.

오레스테스 : 여자인 그대가 손수 칼로 남자들을 죽이시오?

이피게네이아 : 아니, 그대의 머리털에 성수를 뿌리기만 할 뿐이오.

오레스테스 : 죽이는 자는 대체 누구요?

이피게네이아 : 신전 안에 그 일을 맡아보는 남자들이 있소.

오레스테스 : 내가 죽고 나면 나를 받아 줄 무덤은 어떤 것이오?

이피게네이아 : 신전 안의 신성한 불과 넓은 바위틈이오.

오레스테스 : 아아, 누나의 손이 내 시신을 보살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피게네이아 : 오오, 가련한 자여, 그대가 뉘시든 그대의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대가 아르고스 출신이라니까, 내 힘닿는 대로 그대에게 호의를 베풀 것이오. 나는 그대의 무덤에 장식물을 많이 넣어 주고, 노란 기름으로 그대의 육신의 재를 끌 것이며, 황금빛 산 벌의, 꽃에서 흘러내리는 액즙(꿀)을 그대의 화장터에 쏟을 것이오. 자, 나는 가서 여신의 신전에서 서찰을 가져올 것이오.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마시오!...

(이피게네이아, 신전 안으로 퇴장)

코로스 : (오레스테스에게) 내 그대를 위해 통곡하오. 그대가 피투성이 제물로 축성될 때가 임박했으니까요.

오레스테스 : 그렇다면 비탄할 필요 없소. 안심하시오, 낯선 여인들이여!

코로스 : (필라데스에게) 하지만 젊은이여, 우리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대를 행복하다고 칭송해요. 다시 고향 땅을 밟게 되었잖아요.

필라데스 : 친구의 죽음으로 얻은 것이니 부러울 것이 못 되오.

코로스 : (필라데스에게) 아아, 비참한 귀향이로구나! (오레스테스에게) 아아, 그대는 끝장났어요!...

오레스테스 : 이봐, 필라데스. 자네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갖게 되었는가?

필라데스 : 모르겠네. 자네는 내가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묻고 있네.

오레스테스 : 저 젊은 여인은 누구일까? 그녀는 유창한 헬라스 말로 아이이오이族이 일리온(트로이) 앞에서 겪은 고난과, 그들의 귀향과, 새점에 밝은 칼카스와, 아킬레우스에 관해 물었네. 그녀는 또 불행한 아가멤논과 나를 동정해 그 분의 아내와 자식들의 안부를 묻지 않았던가! 저 낯선 여인은 분명 아르고스 출신이야...

필라데스 : 내가 하려던 말을 자네가 한발 앞서 하는군. 한 가지만 빼고 말일세. 말하자면 왕들이 겪은 일은 알려고만 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것이라네. 나는 마음속으로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네.

오레스테스 : 어떤 생각이지? 말해보게...

필라데스 : 자네는 죽는데 나만 햇빛을 본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짓이네. 나는 자네와 함께 항해해 왔으니, 죽음도 자네와 함께 해야만 하네. 아르고스와 주름 많은 포키스 땅에서 나는 비겁하고 의리없는 자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네. 그리고 대중은 생각할 것이네. 내가 자네를 버리고 혼자 살아서 돌아왔다고 말일세. 아니, 내가 자네의 왕권이 탐나서 상속인이 딘 자네 누이(엘렉트라)와 결혼하기 위해 자네 집안이 쑥대밭이 된 틈을 타 자네를 죽여 없애 버렸다고 말일세. 나는 그 점이 두렵고 또 심히 부끄럽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자네와 함께 숨을 거두고, 함께 도살되고, 함께 태워져야 하네. 나는 자네 친구고, 또 남에게 욕 듣고 싶지 않으니까 말일세.

오레스테스 : 자네 말조심하게! 내 불행은 내가 짊어져야 하며, 그것은 하나로 충분하니 갑절로 늘릴 필요가 없네. 자네가 괴롭다고,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함께 고생한 자네를 죽이게 될 때 내게 해당되는 것이니까. 나로서는 신들에게 이토록 당했으니, 목숨을 잃는다는 것이 재앙이 아닐세. 자네는 행복하고, 자네의 집도 정결하고 건강하네. 그러나 나는 신들께 미움받는 불운한 사람일세. 자네가 목숨을 건져, 내가 자네에게 아내로 삼으라고 준 내 누이(엘렉트라)에게서 자식들을 보게 된다면, 내 이름은 계속해서 살아남을 것이고, 내 아버지의 집도 후손 없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네. 그러니 자네는 가서 행복하게 내 아버지의 집에서 살도록 하게! 자네는 헬라스와 말(馬)의 고장 아르고스에 가거든 나를 위해 봉분을 짓고 기념비를 세워 주게. 그리고 내 누이(엘렉트라)는 내 무덤에 눈물과 머리털을 바쳐야 할 걸세. 그리고 그녀에게 전해주게. 나는 아르고스 출신의 한 여인에 의해 제단 가에서 축성되고 도살되었다고! 자네는 절대로 내 누이를 버리지 말게. 자네도 보다시피, 그녀의 집안과 아버지 집은 대를 이을 자손이 없으니까. 잘 가게! 자네는 내가 만난 가장 절친한 친구였고, 자네는 또 나와 함께 사냥하러 갔고, 나와 함께 자랐으며, 내 고난의 무거운 짐을 함께 져 주었네. 하지만 포이보스께서는 나를 속이셨네. 예언의 신이시면서. 그 분은 꾀를 써서 나를 헬라스에서 되도록 멀리 꾀어내셨네... 나는 그 분께 내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분의 명령에 따라 내 어머니를 죽였거늘, 이제 내가 죽임을 당하는구나!

필라데스 : 자네를 위해 무덤이 지어질 것이며, 자네 누이를 나는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네. 오오, 불행한 자여! 나는 자네를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사랑하게 될 것이네. 하지만 아직까지는 신의 예언이 자네를 파멸시킨 것은 아닐세. 자네가 비록 죽음 가까이 서 있기는 하지만. 불행이 극에 달하면 오히려 최고의 행복으로 반전되곤 하는데, 아직은 그럴 기회가 남아 있네.

오레스테스 : 조용히 하게! 포이보스의 말씀들은 이제 내게 아무 쓸모도 없네. 저기 그 여인이 벌써 신전 밖으로 나오고 있네.

(이피게네이아, 손에 서찰을 들고 등장)

이피게네이아 : 이방인들이여, 여기 여러 겹의 서판에 쓴 서찰이 있소. 그 밖에 내가 원하는 것을 들으시오. 처지가 어려울 때나 두려움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될 때나 늘 한결같은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소. 그래서 나는 이 서찰을 아르고스에 전해주게 될 사람이 일단 이 나라를 떠나 고향에 도착하게 되면 내 서찰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게 될까 두렵소.

오레스테스 : 원하는 게 뭐요? 무슨 일로 그토록 괴로워하시오?

이피게네이아 : 그는 아르고스에 가서 이 서찰을 내 가족 가운데 내가 전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전하겠다고 맹세해야 할 것이오.

오레스테스 : 그대도 똑같이 그에게 맹세하시겠소?

이피게네이아 : 말해보시오! 무얼 해야 하지요, 아니면 무얼 하지 말아야지요?

오레스테스 : 죽이지 않은 채로 그를 이 야만족의 나라에서 돌려보내겠다고.

이피게네이아 : 물론이죠. 그렇지 않으면 그가 어떻게 전할 수 있겠소?

오레스테스 : 이 나라의 국왕도 그걸 허락할까요?

이피게네이아 : 그럼요. 내가 그 분을 설득할 것이며, 내가 몸소 배 있는 데까지 데려다 주겠소.

오레스테스 : (필라데스에게) 맹세하게! (이피게네이아에게) 경건한 맹세의 말을 그에게 말해주시오!

이피게네이아 : 자, 말하시오. "나는 이 서찰을 그대의 가족에게 전하겠소."

필라데스 : "나는 이 서찰을 그대의 가족에게 전하겠소."

이피게네이아 : 나는 그대가 검푸른 바위들을 통과하게 해줄 것이오.

필라데스 : 그대는 신들 중에 어느 분을 그대의 맹세의 증인으로 부르겠소?

이피게네이아 : 아르테미스 여신을. 나는 그 분의 집에서 여사제로 봉사하고 있으니까.

필라데스 : 나는 하늘나라의 왕이신 존엄하신 제우스를 부르겠소.

이피게네이아 : 만일 그대가 맹세를 어기고 내게 불의를 저지른다면?

필라데스 : 내게 귀향길이 막히기를! 그대가 나를 구해주지 않는다면?

이피게네이아 : 나는 결코 살아서 아르고스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되기를!...

필라데스 : 한 가지 단서를 다는 것을 양해해주시오. 말하자면 배에 무슨 변고가 생겨 다른 물건들과 함께 서찰도 파도 속에 없어져 버리고 나는 목숨만 건지게 된다면, 그때는 우리 사이의 맹세는 더는 구속력이 없다는 것이오.

이피게네이아 : 내가 어떻게 하려는지 들어보시오! 방해도 많지만 방법도 많으니까요. 편지에 씌어 있는 것을 그대에게 빠짐없이 다 말해주겠소. 그대가 내 가족에게 전할 수 있도록. 그것이 안전하겠소. 그대가 서찰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서찰 자체가 거기에 적힌 것을 말해줄 것이오. 그러나 서찰이 바닷물 속에 없어질 경우, 그대는 자신의 육신을 구하면서 서찰의 내용도 구할 것이오.

필라데스 : 그대는 신들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좋은 말을 해주었소. 말해보시오. 내가 아르고스의 누구에게 이 서찰을 전해야 하며, 그대의 지시에 따라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이피게네이아 :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에게 전하시오. "전에 아울리스에서 제물로 바쳐져, 그곳에서는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피게네이아가 살아서 이 서찰을 전한다."

오레스테스 : 그녀가 어디 있단 말이오? 죽었다가 돌아왔나요?

이피게네이아 : 그대가 보고 있는 여인이 바로 그녀요. 내 말을 방해하지 마시오. "오라비여, 죽기 전에 나를 야만족의 나라에서 아르고스로 데려가고, 이방인들을 죽여야만 하는, 여신을 위한 봉사에서 나를 구해다오!"

오레스테스 : 필라데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우리가 대체 어디에 와 있지?

이피게네이아 : "그러지 않으면 내가 네 집에 저주가 될 것이다, 오레스테스야!" 그대가 명심하도록 나는 그 이름을 되풀이해서 말하는 것이오.

오레스테스 : 오오, 신들이시여!

이피게네이아 : 어째서 그대는 이 일에 신들을 부르는 것이오?

오레스테스 : 아무것도 아니오. 내가 딴 생각을 하고 있었소.

이피게네이아 : 그 애는 물어 보며 그대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 말하시오. "아르테미스 여신께서 나 대신 암사슴 한 마리를 보내 주시어 나를 구해주셨고, 아버지께서는 날카로운 칼로 나를 치시는 줄 알고 그 암사슴을 제물로 바치셨단다. 하지만 여신께서는 내가 이 나라에서 살게 해주셨다." 이것이 이 서찰에 적힌 내용이오.

필라데스 : 그대가 나더라 지키라고 요구한 맹세는 이행하기가 쉽고, 그대는 내게 참으로 훌륭한 약속을 해주었소. 나는 지체없이 내가 맹세한 것을 이행하겠소. 자, 보게! 나는 이 서찰을, 오레스테스, 여기 있는 자네 누이한테서 받아 자네에게 전하고 있네.

오레스테스 : 받겠네. 하지만 나는 서찰을 읽는 대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먼저 택하겠네. 가장 사랑하는 누나, 아직도 약간의 의혹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어쩔 줄 몰라 누나를 끌어안고 기뻐하고 있어요. 내게 기적이 일어났어요.

이피게네이아 : (뒤로 물러서며) 이 무슨 망측한 짓이오, 이방인이여! 여사제의 신성한 옷에 손을 댐으로써 그대는 여사제를 더럽히고 있소.

오레스테스 : 내 친누이여, 누나는 나와 같은 아버지 아가멤논에게서 태어났어요. 내게서 돌아서지 마세요. 누나는 다시는 만나지 못할 줄 알았던 오라비를 찾은 거예요.

이피게네이아 : 그대가 내 오라비라니? 당장 입 닥치시오! 그 애는 아르고스나 나오플리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소.

오레스테스 : 그대의 오라비는 그곳에 없어요, 가련한 여인이여!

이피게네이아 : 라케다이몬 여인인 튄다레오스의 따님(클리타임네스트라)이 그대를 낳아 주었단 말이오?

오레스테스 : 그래요. 펠롭스의 아들의 아들(아가멤논)에게서, 그 분에게서 나는 태어났어요.

이피게네이아 : 무슨 말을 하는 게요? 증거라도 있소?

오레스테스 : 있지요. 아버지의 집에 관해 물어보세요.

이피게네이아 : 그대가 말하고 나는 듣는 편이 좋겠소.

오레스테스 : 말하지요. 먼저 엘렉트라가 내게 말해준 것부터 들으세요. 그대는 아트레우스투에스테스의 다툼을 알고 있나요?

이피게네이아 : 들었소. 두 분은 황금 새끼 양 때문에 서로 다투었소.

오레스테스 : 그대가 그 주제를 고운 천에다 짜 넣던 일이 기억나세요?

이피게네이아 : 가장 사랑스런 이여, 그대가 내 심금을 울리는구려!

오레스테스 : 그대는 그 천에다 태양이 궤도를 바꾼 일도 짜 넣었나요?

이피게네이아 : 그 장면도 고운 실로 짜 넣었소.

오레스테스 : 어머니는 그대에게 목욕물도 아울리스로 보내주었나요?

이피게네이아 : 기억 나요. 행복하지 못한 결혼이라 잊혀지지 않는군요.

오레스테스 : 어때요? 그대의 머리카락을 어머니께 갖다 드리라고 보냈나요?

이피게네이아 : 내 무덤을 위해 내 시신 대신 기념물로 보냈지요.

오레스테스 : 이제는 내가 직접 본 것을 증거로 들게요. 펠롭스 할아버지께서 피사에서 오이노마오스를 죽이시고 힙포다메이아를 아내로 얻으실 때 손에 들고 휘두르시던 오래된 창은 집에, 그대의 규방에 보관되어 있었지요.

이피게네이아 : 가장 사랑하는 오라비여, 그래 틀림없이 너로구나! 오레스테스야, 나는 우리 고향 땅 아르고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너를 다시 찾았구나, 귀염둥이야!

오레스테스 : 그리고 나는 벌써 죽은 줄 알았던 누나를 찾았고요.

(오레스테스이피게네이아, 서로 얼싸안는다)

이피게네이아 : 고통의 눈물이, 환희의 눈물이 흘러내려 네 눈시울을 적시는구나. 그리고 내 눈시울에도. 내가 네 곁을 떠날 때, 너는 아직 연약한 어린아이였고, 집에서 유모의 품속에서 쉬고 있었지. 내 마음이여, 너는 너무나 행복하구나,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방금 일어난 일은 기적 이상이며, 필설로는 다할 수 없는데.

오레스테스 : 아아, 우리가 앞으로도 함께 행복할 수 있었으면!

이피게네이아 : (코로스에게) 나는 지금 야릇한 기쁨을 느껴, 친구들아! 오레스테스가 내 품에서 대기 속으로 날아가 버리지 않을까 두렵구나...

오레스테스 : 우리는 혈통에서는 행운아들이지만, 누나, 지난날의 고난을 돌아보면 우리는 불행한 인생을 타고났던 거예요.

이피게네이아 : 나는 불행한 여인이야. 잔인하게도 아버지께서 내 목에 칼을 들이대셨을 때 나는 그것을 알게 되었지... 오라비여, 나는 축혼가도 없이 결혼침대로, 아킬레우스와의 사기 혼인식장으로 끌려갔지. 제단 옆에서는 눈물 속에 통곡 소리가 울려 퍼졌지...

오레스테스 : 나도 아버지의 비행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어요.

이피게네이아 : 운명은 내게 아버지다운 아버지를 거절했어. 불행에서 또 다른 불행이 생겨나는 법이지... 아아, 가련하게도 나는 얼마나 무서운 비행을, 얼마나 끔찍한 짓을 저지르려 했던가, 오라비여! 하마터면 네가 내 손에 죽어 끔찍한 파멸을 당할 뻔했구나!... 어떤 길을 찾아내어 내가 너를 이 도시에서, 이 도살장에서, 고향 땅 아르고스로 데려갈 수 있을 것인가, 칼이 네 피에 닿기 전에?... 가련한 내 신세, 신이든 인간이든, 아니면 뜻밖의 행운이든, 누가 여기 길 없는 곳에 길을 열어 아트레우스家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우리 두 오누이에게 재앙으로부터의 구원자로서 나타날 것인가?...

필라데스 : 가족끼리 다시 만나 포옹하는 것은 물론 인지상정이지, 오레스테스. 하지만 지금은 우리가 감격을 억제하고 어떻게 하면 구원이라는 훌륭한 명성을 얻어 야만족의 나라에서 달아날 수 있을지 궁리해야 할 때네. 지혜로운 사람들은 일단 기회를 잡으면, 다른 쾌락들을 추구하느라 잡은 행운을 놓치지 않는다네.

오레스테스 : 자네 말이 옳아. 하지만 생각건대, 아직은 행운이 우리 편인 것 같네...

이피게네이아 : 그 어떤 것도 나를 제지해서, 먼저 엘렉트라의 운명에 관해 물어 보려는 내 의도를 막지는 못할 것이야...

오레스테스 : (필라데스를 가리키며) 그녀는 이 사람과 결혼해 행복하게 살고 있어요.

이피게네이아 : 그는 어디 출신이며, 누구의 아들로 태어났느냐?

오레스테스 : 그의 아버지는 포키스 사람으로 스트로피오스라고 불리지요. 스트로피오스는 아트레우스의 딸이자 아가멤논의 누이인 아낙시비아와 결혼했다.

이피게네이아 : 그는 아트레우스의 딸(아낙시비아)의 아들이니 내게는 인척이 되겠구나.

오레스테스 : 내 고종사촌이며, 내게는 하나 밖에 없는 친구지요.

이피게네이아 : 아버지께서 나를 죽이셨을 때 그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었지.

오레스테스 : 그래요. 스트로피오스께는 오랫동안 슬하에 자식이 없었으니까요.

이피게네이아 : (필라데스에게) 내 아우의 남편이여, 만나서 반가워요.

오레스테스 : 그는 내 인척일 뿐만 아니라, 내 구원자이기도 해요.

이피게네이아 : 어떻게 너는 어머니에게 그런 끔찍한 짓을 할 수 있었니?

오레스테스 : 그 일은 말하지 마세요. 나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던 거예요.

이피게네이아 : 무슨 이유로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느냐?

오레스테스 : 어머니 일은 내버려 두세요. 누나는 듣지 않는 편이 좋을 거예요.

이피게네이아 : 그렇다면 말하지 않겠다. 아르고스가 너를 우러러보느냐?

오레스테스 : 아니요. 메넬라오스께서 통치하시고 나는 추방당했어요.

이피게네이아 : 숙부님이 설마 우리 집안의 어려움을 악용한 것은 아니겠지?

오레스테스 : 아뇨. 나는 복수의 여신들이 두려워 나라를 떠난 거예요.

이피게네이아 : 알겠다. 어머니 때문에 여신들이 너를 뒤쫓는 게로구나.

오레스테스 : 그분들이 내 입에 물린 재갈이 피투성이가 될 정도로요.

이피게네이아 : 그래서 이 해안에 네가 광기에 사로잡혔다는 소문이 났었구나.

오레스테스 : 사람들 눈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띈 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에요.

이피게네이아 : 무슨 이유로 이 나라에 발을 들여놓았느냐?

오레스테스 : 나는 포이보스의 신탁에 복종해 여기로 온 거예요.

이피게네이아 : 뭣 하러? 말해도 되는 게냐, 안 되는 게냐?

오레스테스 : 말해도 돼요. 내 수많은 고뇌는 이렇게 시작되었어요. 내가 아직도 말하지 않은 내 어머니의 악행을 내 손으로 복수하자, 복수의 여신들이 나를 뒤쫓으며 나라에서 내쫓았어요. 그러자 록시아스(아폴론)께서 내 발걸음을 아테나이로 향하게 하시며 그곳에서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복수의 여신들의 재판을 받게 하셨지요. 그곳에는 신성한 법정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전에 제우스께서 살인을 한 아레스를 위해 세워 주신 거예요... 나는 아레스의 언덕에 있는 법정으로 가서 한쪽 자리에 앉았고, 다른 자리에는 복수의 여신들 가운데 제일 연장자가 앉았어요. 그리하여 모친 살해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을 때, 포이보스(아폴론)께서는 자신의 증언으로 나를 구해주셨고, 팔라스(아테네)께서 계표(計票)를 하시자 찬반동수가 되었고, 그래서 나는 살인재판에서 승소했지요. 판결에 승복한 복수의 여신들은 법정 바로 옆에다 그들에게 신전을 지어준다는 조건으로 그곳에 눌러 앉았어요. 그러나 판결에 불복하는 복수의 여신들은 쉴 새 없이 달리며 끊임없이 나를 뒤쫓았어요. 그래서 나는 마침내 다시 포이보스의 성역으로 가서 성소 앞에 엎드려, 나를 파멸시키신 포이보스께서 나를 구해주시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굶어 죽겠다고 맹세했지요. 그러자 포이보스께서 황금 세발솔에서 음성을 내보내시며 나를 이곳으로 보내셨는데, 하늘에서 떨어진 신상을 가져와 아테나이인들의 나라에 세우라는 것이었지요. 그 분께서 내게 약속하신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나를 도와주세요. 우리가 여신상을 손에 넣게 되면 나는 광기에서 해방되어 누나를 노(櫓)가 많이 달린 배에 태워 뮈케나이로 도로 데려갈 거예요. 자, 누나,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누나, 아버지의 집을 구하고, 나를 구해주세요. 우리가 하늘에서 내려온 여신상을 수중에 넣지 못하면, 내 모든 것도, 펠롭스家의 운명도 끝장나니까요.

코로스장 : 신들의 노여움이 탄탈로스의 자손들을 무섭게 덮치며 그들을 고난의 바다로 휩쓸어 가는구나!

이피게네이아 : 네가 이리 오기 전에도 나는 늘 아르고스가 그리웠고, 네가 보고 싶었단다, 오라비여! 네 소원은 내 소원이기도 해. 나는 너를 역경에서 구하고, 무너져 내리는 아버지의 집을 일으켜 세우고 싶어. 나를 죽이신 분에게 원한을 품지 않고 말이야... 한 가지 두려운 것은 내가 어떻게 여신을 속일 수 있으며, 신성한 대좌(臺座)가 빈 것을 국왕이 보게 되면 어떻게 그를 속일 수 있느냐 하는 거야. 그 때는 나는 죽어야 해.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까. 그러나 만일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이 이루어진다면, 즉 네가 신상을 가져가고 동시에 고물이 아름다운 배에 나를 태워 간다면, 모험은 성공적으로 끝나겠지. 하지만 배를 못 타게 되면 나는 끝장이야.... 그러나 너를 구할 수 있다면 나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겠어. 남자가 죽고 나면 집안이 허전해지지만, 여자의 죽음은 그다지 대수로운 게 아니니까.

오레스테스 : 어머니를 죽인 터에 나는 누나마저 죽이고 싶지 않아요. 어머니의 피로 충분해요. 나는 누나와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고 싶어요. 나는 여기서 쓰러져 죽지 않고 누나와 함께 고향에 가게 되거나, 아니면 죽어서 누나 곁에 머무를 거예요. 내 생각 좀 들어보세요. 우리의 계획이 아르테미스 여신의 뜻에 어긋난다면, 어떻게 록시아스께서 여신상을 팔라스의 도시로 가져오라고 내게 명령하셨겠으며, 어떻게 누나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주셨겠어요?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건대, 나는 귀향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게 돼요.

이피게네이아 : 우리가 어떻게 죽음에서 벗어나는 동시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겠어? 거기에 우리 귀향의 어려움이 있어. 소망만으로는 될 일이 아니야.

오레스테스 : 우리가 국왕을 죽여 없애 버린다면?

이피게네이아 : 나그네가 주인을 죽이다니, 그건 나쁜 조언이야.

오레스테스 : 그래서 나와 누나가 살 수 있다면 그런 모험이라도 해야지요.

이피게네이아 : 네 열의는 좋다만 난 그렇게 못해.

오레스테스 : 누나가 나를 이 신전 안에 숨겨 주신다면 어떨까요?

이피게네이아 : 우리가 야음을 틈타 도주할 수 있도록?

오레스테스 : 밤은 도둑 편이고, 빛은 진리 편이니까요.

이피게네이아 : 안에는 신전 파수꾼들이 있어서 그들이 우리를 보게 될 거야.

오레스테스 : 우린 끝장났군요. 어떻게 해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지요?

이피게네이아 : 한 가지 방법이 있을 것 같긴 한데.

오레스테스 : 어떤 방법이지요? 나도 알게 말해주세요.

이피게네이아 : 나는 네 고통을 핑계로 이용할까 해.

오레스테스 : 음모를 꾸미는 데는 역시 여자들이 능하군요.

이피게네이아 : 나는 네가 어머니를 죽이고 아르고스에서 왔다고 말할래.

오레스테스 : 이익이 된다면 내 고통을 이용하세요.

이피게네이아 : 여신께 그런 제물을 바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말할래... 너는 정결하지 못하다고. 나는 흠 없는 것만 제물로 바친다고.

오레스테스 : 그런다고 여신상을 훔치기가 수월해질까요?

이피게네이아 : 너를 바닷물로 정화해야 한다고 말할래.

오레스테스 : 우리 항해의 목표인 신상을 신전 안에 남겨 둔 채로요?

이피게네이아 : 네가 만졌으니 신상도 씻어야 한다고 말할래.

오레스테스 : 어디서요? 파도에 씻기는 바다의 만(灣)에서 말인가요?

이피게네이아 : 네 배가 밧줄을 매어 놓고 정박해 있는 곳에서.

오레스테스 : 신상은 누가 안고 가지요? 누나가, 아니면 다른 사람이?

이피게네이아 : 내가. 나만이 신상을 만질 권한이 있으니까.

오레스테스 : 필라데스는 이번 일에서 어떤 역할을 맡게 되지요?

이피게네이아 : 그도 너와 마찬가지로 손이 피로 더럽혀졌다고 말할래.

오레스테스 : 그러시되 왕이 알게 하실래요, 모르게 하실래요?

이피게네이아 : 말로 그 분을 설득할래. 그 분 모르게 할 수는 없으니까. 다른 일들은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네가 보살펴야 해.

오레스테스 : 좋아요. 내 쾌속선은 벌써 출항준비가 되어 있어요. 이제 필요한 것은 이 여인들이 비밀을 지켜 주는 것 한 가지 뿐이에요. 설득의 말을 찾아내어 간청해보세요. 여자는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재능이 있으니까요. 그렇게만 되면 다른 일들은 다 잘될 거예요.

이피게네이아 : 오오, 가장 사랑하는 여인들이여, 내 시선은 너희들을 향하고 있어. 내가 행복해지느냐 불행해지느냐, 조국과 오라비와 가장 사랑스런 아우를 빼앗기느냐 하는 것은 너희들에게 달려 있어. 나는 먼저 이렇게 시작하고 싶어. 우리는 여인들로서 서로 호의를 품고 있으며, 여인에 관계되는 모든 일에 相扶相助할 각오가 되어 있어. 그러니 너희들은 이 일을 비밀로 하고 우리가 도망할 수 있도록 도와 다오. 입이 무겁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야. 이것 봐, 더없이 사랑하는 우리 세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한 가지 운명이야. 그것은 귀향 아니면 죽음이야. 내가 구원받으면 너희들도 내 행운을 공유하도록 너희들을 헬라스로 데려가겠다. 오른손을 잡고 너에게 애원해. 너에게도 간청해. 그리고 너에게도. 네 사랑스러운 볼과, 네 두 무릎과, 네 집에서 가장 소중한 것과, 네 부모와, 네게 자식들이 있다면 네 자식들의 이름으로! 뭐라고 말할 테냐? 너희들 가운데 누가 찬성하고, 누가 반대하는지 말해봐! 너희들이 내 말에 찬성하지 않는다면 나는 끝장이고, 가련한 내 오라비도 마찬가지야.

코로스장 : 용기를 내세요, 사랑하는 여주인님. 부디 구원받으세요. 위대하신 제우스께 맹세코, 그대가 내게 비밀로 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면 나는 무엇이든 발성하지 않겠어요.

이피게네이아 : 그 말에 대한 보답으로 너희들에게 축복과 행복이 있기를! (오레스테스필라데스에게) 이제 너희들은 신전 안으로 들어가도록 해. 곧 이 나라의 국왕이 와서, 이방인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을 마쳤는지 묻게 될 거야. 아울리스 만에서 사람 잡는 아버지의 무시무시한 손에서 나를 구해주셨던 존경스러운 여신이여, 이번에도 나와 저들을 구해주소서! 그러지 않으면 그대 때문에 인간들은 더는 록시아스의 말씀을 믿지 않을 거예요. 자비를 베푸시어 야만족의 나라에서 아테나이로 가소서! 축복받은 도시에서 거주하실 수 있는데도, 그대가 이곳에 거주하신다는 것은 그대답지 않은 일이에요.

(이피게네이아, 오레스테스, 필라데스 신전 안으로 퇴장)

코로스 : 바다의 암벽에서 비탄의 노래 부르는 물총새야.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네가 쉬지 않고 노래로 남편을 애도한다는 것을!... 차라리 철저히 불행에 익숙한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으니까, 불행은 행복으로 반전되기 마련. 그러나 행복이 불행으로 반전한다면 그것은 인간들에게 힘든 운명이라네. 하지만 존경스러운 여주인이시여, 그대는 쉰 명의 선원이 노 젓는 아르고스의 배를 타고 고향으로 실려 가겠지요...

(국왕 토아스, 시종들을 거느리고 등장)

토아스 : (코로스에게) 신전을 지키는 헬라스 여인은 어디 있는가? 그녀는 이방인들을 벌써 제물로 바쳤는가? 그들의 육신은 성소 안에서 활활 불타고 있는가?

(이피게네이아,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들고 등장)

코로스장 : 저기 모든 것을 설명드릴 수 있는 그녀가 있나이다, 왕이시여!

토아스 : (깜짝 놀라며) 저런! 아가멤논의 따님이여, 어인 일로 그대는 여신상을 대좌에서 들어내어 품에 안고 오는 것이오?

이피게네이아 : 왕이시여, 거기 입구에 그대로 서 계십시오.

토아스 : 신전 안에서 대체 무슨 괴이한 일이 생긴 것이오, 이피게네이아?

이피게네이아 : 끔찍한 일이 생겼나이다. 정결한 의식을 위해 말씀 드리옵니다.

토아스 : 대체 어떤 변고가 일어났단 말이오? 분명히 말해보시오.

이피게네이아 : 그대들이 사냥해주신 제물들은 정결하지 못하나이다, 왕이시여.

토아스 : 확실히 알고 하는 말이오? 아니면 추측일 뿐이오?

이피게네이아 : 여신상이 대좌에서 뒤로 돌아섰나이다.

토아스 : 저절로? 아니면 지진이 여신상을 돌려놓았소?

이피게네이아 : 저절로 그랬나이다. 그러면서 여신상은 눈을 감았나이다.

토아스 : 그 이유가 뭐요? 이방인들이 부정(不淨)하기 때문인가요?

이피게네이아 : 바로 그 때문이옵니다. 그 둘은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까요.

토아스 : 그들이 해변에서 이민족 가운데 한 명을 죽였던가요?

이피게네이아 : 그들은 제 집에서 살인을 하고 이리로 왔나이다.

토아스 : 누구를? 나는 그것이 알고 싶소.

이피게네이아 : 그들은 합세하여 어머니를 죽였나이다.

토아스 : 아폴론 신이시여! 그런 짓은 야만족도 할 수 없을 것이오.

이피게네이아 : 온 헬라스가 그들을 박해하고 추방했나이다.

토아스 : 그래서 그 때문에 그대는 신상을 들고 나오는 것이오?

이피게네이아 : 살인에서 벗어나시도록 맑은 대기 속으로 모시고 나왔나이다.

토아스 : 그대는 두 이방인이 오염된 줄 어떻게 알았지요?

이피게네이아 : 여신상이 돌아섰을 때 내가 그들을 심문했나이다.

토아스 : 그토록 눈이 날카롭다니, 헬라스가 그대를 현명한 여인으로 길렀구려.

이피게네이아 : 그런데도 그들은 달콤한 미끼로 내 마음을 호리려 했나이다.

토아스 : 그들이 아르고스로부터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던가요?

이피게네이아 : 네, 하나 뿐인 내 오라비 오레스테스가 잘 지내고 있다고 했나이다.

토아스 : 그대가 반가운 소식을 듣고 그들을 살려 주도록 말인가요?

이피게네이아 : 내 아버지께서도 살아 계시며 잘 지내신다고 했나이다.

토아스 : 그래도 그대는, 당연한 일이지만, 여신 쪽으로 기울어졌나요?

이피게네이아 : 네, 나를 파멸케 한 헬라스 전체를 나는 증오하니까요.

토아스 : 말해보시오. 우리가 저 두 이방인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이피게네이아 : 정해진 관습은 존중되어 마땅하옵니다.

토아스 : 축성할 물과 칼이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던가요?

이피게네이아 : 나는 먼저 그들을 세정(洗淨)할까 하옵니다.

토아스 : 샘물로, 아니면 바닷물로?

이피게네이아 : 바다는 사람들의 모든 부정을 씻어 주옵니다.

토아스 : 그러고 나면 그들의 희생이 더욱더 여신의 마음에 들겠지요.

이피게네이아 : 그러면 나도 내 의무를 더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 될 것이옵니다.

토아스 : 그런데 파도라면 신전 바로 가까이까지 밀려들지 않소?

이피게네이아 : 외딴 곳이라야 하옵니다. 우리는 그 밖에도 할 일이 있으니까요.

토아스 : 원하는 곳에서 하시오. 나는 금지된 것은 보고 싶지 않소.

이피게네이아 : 나는 이 여신상도 정화해야 하옵니다.

토아스 : 모친 살해범이 정말로 여신상을 만졌다면 그래야겠지요.

이피게네이아 : 그렇지 않다면 여신상을 대좌에서 들어내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토아스 : 그대의 경건과 염려는 적절한 것이오.

이피게네이아 : 이제 한 가지만 더 허락해 주시옵소서!

토아스 : 그것을 말하는 것은 그대의 권한이오.

이피게네이아 : 이방인들을 사슬로 묶으소서!...

토아스 : 자, 하인들아, 그들을 묶도록 하라.

이피게네이아 : 그들의 머리를 옷으로 싸도록 하라!

토아스 : 그래, 불타는 태양이 오염되지 않도록!

이피게네이아 : 도시에 사자 한 명을 보내시어... 다들 집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전해 주시옵소서!

토아스 : 그들이 살인자들과 만나지 않도록 말인가요?

이피게네이아 : 만나면 부정을 타게 되옵니다.

토아스 : (시종 한 명에게) 네가 가서 전하도록 하라!

이피게네이아 : 아무도 제 모습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토아스 : 그대는 도시를 알뜰히도 보살피는구려.

이피게네이아 : 그리고 누구보다 그럴 필요가 있는 친구들도요.

토아스 : 나를 두고 한 말이로군요.

이피게네이아 : 당연하지요.

토아스 : 도시 전체가 그대를 찬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오.

이피게네이아 : 그대는 여기 신전에 머물러 계시며...

토아스 : 여기서 내가 뭘 하지요?

이피게네이아 : 불로 집 안을 정화하시옵소서!

토아스 : 그러지요. 그대가 돌아왔을 때 집 안이 정결하도록.

이피게네이아 : 그리고 이방인들이 신전 밖으로 나가자마자... 겉옷으로 눈을 가리소서.

토아스 : 내가 살인에 오염되지 않도록 말이지요.

이피게네이아 : 내가 너무 오래 지체한다 싶으시면...

토아스 : 얼마나 오래 지체할 것으로 보아야 할까요?

이피게네이아 : 놀라지 마옵소서.

토아스 : 여신에 대한 의무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잘 수행하시오...

(오레스테스필라데스, 사슬에 묶여 신전에서 끌려 나온다)

이피게네이아 : 저기 벌써 신전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 보이는구나... 시민들에게 큰 소리로 알리노니, 피로 더럽혀진 이들을 피하시오... 비키시오, 그대들 중 누군가 부정을 타지 않도록! 순결하신 여왕이시여, 제우스레토의 따님이시여, 내가 그들의 살인죄를 씻고 제물을 바쳐야 할 곳에서 바치게 되면, 그대는 청결한 집에 거주하시게 되고, 우리는 행복할 거예요.

(이피게네이아, 오레스테스, 필라데스 일행은 바다 쪽으로 내려가고, 토아스는 신전 안으로 퇴장)

코로스 : 레토의 아드님(아폴론)은 훌륭하시도다! 그 분을 그녀(레토)는 델로스 섬의 풍요한 골짜기에서 낳으셨다네. 금발머리에 키타라의 명수이신 그 분을. 활로 명중하기를 즐기시는 아르테미스 여신과 함께. 바위투성이 섬(델로스)에서, 이름난 출산의 장소에서... 포이보스(아폴론)여, 그대는 용을 죽이시고 지극히 신성한 신탁소에 드셨나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황금 세발솥에, 거짓을 모르는 왕좌에 앉으셔서 지극히 신성한 곳에서 인간들에게 신탁을 나눠 주시나이다...

(사자 등장)

사자 : 그대들 신전지기들이여, 제단의 수호자들이여, 이 나라의 국왕 토아스님은 어디로 가셨소?... 국왕을 신전 밖으로 불러내 주시오!

코로스장 : 무슨 일이지요?

사자 : 두 젊은이가 달아나 버렸소. 그들은 지금 아가멤논의 딸의 계략에 의해 이 나라에서 도망치고 있는 중이오. 헬라스 배(船)의 품속에 신성한 신상을 훔쳐 가지고 말이오.

코로스장 : 그대는 믿을 수 없는 말을 하는군요. 하지만 그대가 찾고 있는 국왕께서는 이미 신전을 떠나셨어요.

사자 : 어디로? 일어난 일을 그 분께서 직접 들으셔야 하오.

코로스장 : 우리는 몰라요. 가서 그 분을 찾아보세요. 그 분을 만나 그대의 말을 전할 수 있을 때까지.

사자 : 보시오. 여자란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족속인지! 그대들도 이번 사건의 공범들이오.

코로스장 : 미쳤군요. 이방인들이 달아난 것이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죠? 어서 궁전에나 가보세요!

사자 : 누가 내게 명확히 말해주기 전에는 가지 않겠소. 국왕께서는 신전 안에 계시오, 안 계시오? (문을 두드리며) 이봐요! 안에 있는 이들에게 말하겠소. 빗장을 벗기고 국왕께 아뢰시오. 내가 그 분께 전해드릴 나쁜 소식을 한 짐 짊어지고 여기 문간에 와 있다고 말이오!

토아스 : (신전에서 나오며) 대체 어느 놈이 여기 여신의 신전 앞에서 이렇게 고함을 지르며 온 신전 안이 울리도록 문을 치는 게냐?

사자 : 이럴 수가! 이 여인들은 나를 신전에서 쫓아 버릴 양으로 전하께서 안에 계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안에 계시는데도.

토아스 : 그들이 대체 어떤 이익을 바라거나 노리고 그랬던 것일까?

사자 : 그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말씀드릴 터이니, 당장 급한 것부터 들으십시오. 여기서 제단을 지키던 여인이, 이피게네이아가 이 나라를 떠났나이다. 이방인들과 함께, 신성한 여신상을 갖고. 정화는 속임수였습니다.

토아스 : 뭣이? 그녀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지?

사자 : 그녀는 오레스테스를 구하려 했습니다. 전하께서도 놀라시겠지만.

토아스 : 오레스테스라니? 튄다레오스의 딸(클리타임네스트라)이 낳은 아들 말이냐?

사자 : 여신께서 이 제단에 바치기로 정해 놓으셨던 자 말입니다.

토아스 : 이건 기적이로구나!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이 어디 있을까?

사자 : 일에만 마음 쓰지 마시고, 제 말을 들어 보시지요. 어떻게 추격해야 이방인들을 잡을 수 있겠는지!

토아스 : 말해보아라. 네 말이 옳다. 그들의 도주 목적지가 가깝지 않으니, 그들이 내 함선들을 피하지 못하리라.

사자 : 오레스테스의 배가 몰래리 정박해 있던 해안에 우리가 도착했을 때, 아가멤논의 딸은 그녀가 행하고자 하는 번제와 정화의식은 완전 비밀리에 행해져야 하는 양, 전하께서 이방인들의 간수로 딸려 보내신 우리더러 멀찍이 떨어지라고 손짓하더니 자신은 두 이방인이 묶인 사슬을 손에 잡고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미심쩍기는 했으나 전하의 하인들은 그 지시에 따랐습니다. 잠시 뒤 그녀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려고, 정말로 살인죄를 정화하는 양 고함을 지르며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呪文)을 노래했습니다. 우리가 한참 동안 앉아 있었을 때, 이방인들이 풀러 나서 그녀를 죽이고는 지체없이 달아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금지된 것을 보는 것이 두려워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금지되긴 했어도 그들이 있는 곳에 가보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헬라스의 배 한 척이 벌써 노들을 갖추고 출발준비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쉰 명의 선원이 있었고, 두 젊은이는 사슬에서 풀려 뱃고물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선원들 증 일부는 장대들로 이물을 붙들고 있었고, 일부는 닻을 끌어올리고 있었습니다. 또 일부는 고물 밧줄을 끌어들이고 있었고, 일부는 이방인들을 위해 서둘러 사다리를 바다로 내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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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Neely Led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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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Neely Ledner

Birthday: 199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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